[이성훈의 쑈사이어티]

[오피니언타임스=이성훈] 며칠 전, 급히 과외를 가던 날이었다. 밥을 주던 냥이가 죽었다. 녀석은 바닥에 누워있었다. 빨간 카펫 위에 누운 듯, 바닥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오토바이? 아니 어쩌면 자동차에 치인 것 같았다. 마음은 아팠지만 가던 길을 갔다. 과외에 지각하면 월급 입금날짜가 미뤄지는 걸.

전부 거짓말 같았다. 녀석은 2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주던 사료를 맛있게 먹었다. 2kg에 8900원 밖에 안하는 싸구려 사료였지만, 평소 음식물쓰레기통을 뒤척이던 녀석은 맛있게 먹어줬다.

©이성훈

녀석은 영락없이 고등어를 닮았다. 은빛 바탕에 푸른 등줄기, 이따금 검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태어난 지 2개월도 안 된 작은 고양이었다. 갈빗뼈가 드러난 배는 매끄러우면서도 앙상했고, 듬성듬성 난 털은 푸석푸석했고, 삐쩍 마른 얼굴에 두 눈은 유난히 빛났다. 이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됐다.

나는 녀석을 한 번도 만져본 적이 없다. 고양이 한 마리의 몸통만큼을 '1냐옹미터'라고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5냐옹미터의 간격을 유지했다. 그 거리가 2냐옹미터까지 가까워진 것은 불과 3일 전이었다. 밥을 먹는 순간에도 녀석은 나의 움직임을 주시했는데, 내가 하품만 해도 녀석은 줄행랑을 쳤다. 그러면서도 내가 부르면 저 멀리서 나타나곤 했다. 밥 때문인지, 내가 보고 싶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3형제 중 제일 먼저 달려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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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슬프냐고 하면, 썩 그렇지는 않다. 우린 그런 사이니까. 녀석은 내게 다가오지 않았고, 나도 굳이 녀석을 만지려고 하지 않았다. 더 가까워지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야박할 것도 없는 것이 녀석과 놀기에 나는 너무 낯설고 덩치가 컸다. 그리고 길고양이는 세균, 진드기 덩어리니까.

그 골목에는 고양이를 닮은 사람들이 살아간다. 고양이에게 밥을 주다보면 리어카에 폐지를 가득 실은 노인들이 연신 거리를 지나간다. 한 줌에 50원도 안 되는 싸구려 사료를 주면서도 나는 그들에게 미안했다. 하루종일 100kg폐지를 모아서 1만원을 버는 노인들은, 100g에 300원짜리 사료를 먹는 고양이들을 지나쳐갔다. 현관문을 열면 길가가 훤히 보이는 집도 있었다. 한번은 현관문이 열렸는데, 팬티바람의 남녀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에게 놀랐다. 사람도 고양이랑 다를 거 없이 사는 동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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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이, 고양이가 꼬인다고 싫어하지는 않을까?'
‘고양이 울어대는 게 시끄럽지는 않을까?’
'먹다남은 사료부스러기는 청소해야겠지?‘

나는 지역민들의 눈치를 봤다. 주민들의 미움을 살까봐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쓰레기통에 사료를 뿌려주기도 했다. 그런데 녀석은 운이 좋았다. 골목 주민들도 녀석을 사랑했다. 녀석은 내가 주는 사료를 먹고, 때로는 미싱사 아줌마가 주는 고등어 뼈를 씹고, 어제는 웰시코기를 키우는 앞집의 초등학생 여자애가 주는 우유 접시를 핥았다.

아기 고양이가 나날이 쑥쑥 커가는 모습은 기특했다. 사람 손바닥만 하던 것이 어느덧 팔뚝만해졌다. 고작 한 달 남짓한 시간동안 1.5배는 넘게 큰 셈이다. 고양이가 아니라 고무줄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아기고양이는 예쁘다. 아기 때부터 보아왔다면 큼직한 성묘도 제법 예쁠 것 같다. 그런데 이젠 다 소용 없게 됐다. 생후 2달만에 고등어는 죽고 말았다.

집에서 키울까, 생각도 해봤다. 내 방은 6평이 넘어 제법 넉넉하고, 침대 밑이나 창고도 있어서 고양이가 숨을 공간도 충분하다. 창문이 외통수라서 집안 환기가 안 되는 건 좀 아쉽지만, 매일 청소하면 못 키울 것도 없었다고 생각했다. 다만 50만원이 넘는 고양이 예방접종-중성화 비용을 감당하기는 버거웠다. 미안하지만 녀석을 거둬들일 수는 없었고, 그저 길가에서 지나가다 인사하고 싸구려 밥을 줄 뿐이었다.

과외가 끝나고 늦은 밤 11시, 나는 죽은 녀석을 다시 찾아갔다. 누군가 녀석을 길가 구석으로 치워뒀다. 녀석에게 밥을 주던 주민들도 녀석을 봤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녀석을 묻어주지 않았다. 그맘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살아있는 고양이는 귀여운데, 죽은 고양이는 이상하리만큼 불길했다. 곁에 가면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죽은 고양이는 징그러웠고 더러웠고 그래서 거둬주기 싫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살아있을 때는 그렇게도 친해지고 싶었는데, 죽고 나니까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렇지만 녀석이 쓰레기봉지에 담겨 버려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두꺼운 목장갑을 가져와 손에 끼었다. 그 위에 비닐장갑을 한 번 더 둘렀다. 길고양이는 세균이 많을 테니까... 아니다. 실은 녀석의 죽음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 감촉을 느끼지도,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장갑을 두껍게 끼었다.

죽은 녀석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죽은 지 4시간도 안 됐는데도 벌써 굳었다. 그리고 무척 가벼웠다. 마치 종이인형처럼 텅텅 비었다. 살아있을 때도 이런 감촉이었을까, 궁금했다. 내가 녀석을 만지고 있다는 사실은, 녀석이 죽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살아 있을 때는 만질 수 없던 녀석을, 녀석이 죽었기 때문에 나는 만지고 있었다. 이건 고양이가 아니라 죽음을 만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을 라면 박스에 넣어서 옮겼다. 들고 가는 내내 박스가 덜컹거렸다. 마치 발톱으로 긁는 듯한 '벅벅' 소리도 났다. 혹시나 녀석이 반쯤 살아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이성훈

골목길은 조용하다. 언제나 그랬듯이 노인들의 리어카가, 배달원의 오토바이가, 청소부의 트럭이 골목길을 지나간다. 그들이 밟고 지나가면서 녀석의 핏자국은 희미해졌다. 애당초 아기 고양이가 살아가기에는 험악한 골목이었다. 지금도 골목을 지나갈 때면 녀석의 모습이 내 눈앞에 아른거린다. 지금도 저기 낡은 집 대문 아래로, 주차된 자동차 바퀴 밑에서 고등어를 닮은 녀석이 아른거린다.

 이성훈

20대의 끝자락 남들은 언론고시에 매달릴 때, 미디어 스타트업에 도전하는 철없는 청년!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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