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의 전원일기]

[오피니언타임스=동이] 버리기 쉽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옛 물건이죠. 버릴까 말까 몇번을 망설이다 포기하고 여전히 끌고 다니는 골동품이 주인공입니다. ‘아까워서’라기 보다는 ‘버리기 송구해서’라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누구나 사연을 안고 있는 물건이 한두개 있게 마련이죠. 동이도 많지는 않지만 사연담긴 옛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쇠절구입니다.

무쇠로 만든 절구 ©동이

무쇠로 만든 작은 절구죠. 얼마나 썼는지 쇠절구 바닥에 실금이 갔습니다. 버렸으면 일찍이 다른 철물로 태어났을 놈이죠. 어머니는 이 절구로 찹쌀과 볶은 콩을 빻아 자식들에게 콩떡을 해먹였습니다. 참깨도 빻고 고추도 빻고... 매운 고추를 빻을 때면 생쑥을 뜯어 코를 막고 절구질하셨습니다.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시골로 시집 온 당신은 쌈지돈을 모아 시골장에서 이 쇠절구를 사오셨습니다. 50년 전쯤이니 그 시절만해도 나무절구나 돌절구보다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신상품이었죠. 10kg 족히 나가는, 이 쇠절구에 수수 한말을 넣어 10리길을 이고 걸어왔다니 새끼들 먹여살리겠다는 일념 외에 뭐가 있었을까 싶습니다. 실금은 갔지만 거친 곡물 빻는 데는 아직 쓸만해 언젠가 시골생활을 본격적으로 하면 써볼까 합니다. 방앗간보다 느릿한 생활의 한켠을 맛보리라~하면서.

다른 하나는 앉은뱅이 재봉틀입니다.

앉은뱅이 재봉틀 ©동이

1960년대 제품. 그 때만해도 바느질로 옷해 입던 시절이라 재봉틀이 큰 살림살이였습니다. 동네사람들 이 재봉틀로 옷만든다고 동이네집 들락거렸고 누나 혼사땐 이 미싱으로 이불홑창을 다 만드셨답니다. 꺼떡대지만 지금도 돌아는 갑니다. 날잡아 을지로 미싱상가에 가서 리모델링해볼까 합니다.

청동화로와 놋쇠주걱도 있습니다.

청동화로와 놋쇠주걱 ©동이

하도 써서 화로 다리쪽에 구멍이 났습니다. 리벳역할을 하던 금속이 떨어져 행방불명됐습니다. 지금이야 쓸 일이 없지만 시골에 황토방이라도 하나 마련하면 아궁이에 불피워 한번 써볼 생각입니다. 어머니는 추운 겨울 새벽녘에 아궁이에 불지피고 숯불을 화로에 담아 방에 들여놓곤하셨죠. 청동화로에 된장뚝배기를 얹어 밥먹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늘 반짝반짝 닦여있던 놈인데 지금은 방 한쪽에서 녹슬어가고 있습니다.

놋쇠주걱도 화로, 놋요강과 함께 가져오신 혼수품입니다. 이 녀석도 얼마나 솥바닥을 긁어댔는지 3분의 1가량 닳았습니다. 놋쇠요강은 어느날 우물가에 놨더니 망태꾼이 집어갔다죠.

'백자'도 하나 있습니다.

고춧가루나 깨 등을 담았던 작은 항아리 ©동이

값나가는 백자가 아니고 생활백자입니다. 서민들이 쓰던 하얀 항아리입니다. 쇠절구로 빻은 고춧가루나 깨를 이 항아리에 넣고 쓰셨죠. 외할머니가 쓰던 항아리를 가져온 것이라 골동품상이 팔라해도 팔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동이도 저 항아리를 처분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100년이 채 안되는 생활자기이고 값도 얼마 나가지 않겠지만 동이에겐 여전히 국보급입니다. 저렇게 의젓하게 앉아있다가 추억이 사라지면 같이 사라지겠죠. 그때까지는 같이 갈렵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현무암으로 만든 맷돌 ©동이

장모님이 쓰시던 현무암 맺돌입니다. 20여년 전 이사하시면서 버리시겠다는 걸 끙끙대고 가져다놨습니다. 현자(賢者)들은 늘 비우라고 얘기하지만 실천은 늘 어렵습니다.

옛 손길과 숨결이 깃든 것들을 버려? 하는 생각에 이르면 바로 ‘동작그만 모드’로 들어가니까요. 크고 작은 박물관도 아마 이러한 심리기제들이 작동해 생겨난 게 아닌가 합니다. 60~70년대 동이네 의식주를 도와준 공신들이서 그런가, 자족의 사료(史料)같아 볼 때마다 새롭습니다.

시골가면 그 기분 살려서 저 녀석들과 자급자족도 가능하지 않을까?  ‘쓸데없는 자신감’마저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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