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혜련의 그림자]

[오피니언타임스=최혜련] 어느 순간 삶은 ‘살아간다’보다 ‘버틴다’는 표현에 가까워졌다. 딱히 불행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할머니가 늘상 말씀하시던 ‘죽지못해 산다’는 말이 문득 생각나곤 했다. 나를 행복하게 했던 것들의 이름을 잊어버릴 정도로 건조하게 하루를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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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입시와 취업

몇년동안 바라본 대학입시에, 그 과정에 있었던 수많은 시험에 지친지 오래됐지만 아직도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느새 이상은 현실의 파도에 휩쓸려 더 이상 그 자취조차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안정된 무언가를 쫓기 시작했지만 시험을 볼수록, 스펙이라 부를만한 것을 쌓아갈수록 마음은 공허해졌다. 게다가 노력이 미덕이 아닌 필수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내가 열심히 이뤄낸 결과는 성취가 아닌 최소한의 자격을 충족시킬 뿐이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기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는데 항상 회의적이지만 욜로!를 외칠 용기는 없다. 당장 상아탑의 의미를 잃어버린 대학을 자퇴하고 지겨운 시험 준비를 그만두고 싶어도 ‘그 뒤는 어떻게 할 건데? 취업은?’라는 생각의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이와 동시에 이런 고민은 사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요양병원에 계신 할머니를 보며, 매일 지친 몸을 이끌고 출근하는 부모님을 보며, 집안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취업을 해야만 했던 친구를 보며 모든 고민을 삼켰다. 사람마다 각자의 아픔이 있고 그 고통을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교통사고를 당해 피를 철철 흘리는 사람 앞에서 손가락 베였다고 투정을 부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뱉지도 삼키지도 못한 채 하루를 꾸역꾸역 버티고 있다.

# 인간관계

목적에 의해 엮이는 관계가 늘어나면서 막상 연락할 사람은 줄어들고 있다. 그마저도 각자의 시간이 바빠져서 약속을 잡는데 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서로 ‘시간될 때 한번 보자’는 앵무새같은 말을 반복하며 다음을 기약한다. 그러다보니 마치 시간이 관계를 침식하는 것처럼 일상 이야기조차 나누기 어려운 상태가 되고 있다. 내가 먼저 털어놓은 개인적인 이야기는 약점이 되어 돌아와서 가벼운 말들만 늘어놓으니 점점 사람을 만나도 외로움만 깊어졌다.

내가 좋아하는 이들을 만나는 데도 노력이 필요한 것, 헤어진 애인, 이익을 바라는 관계, 뒤에서 욕하다가도 앞에서 반갑게 인사하던 사람 등이 섞여 천천히 쌓여온 관계의 스트레스가 폭발했다. 그래서 마치 나를 좀 봐달라고 떼를 쓰듯 처음으로 카톡을 지워버렸다. 그랬더니 오히려 핸드폰이 조용해졌다. 다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느라 바쁜지, 전화를 할 정도로 하다못해 문자 한번 보낼 정도로 깊은 사이는 아니었는지. 새삼스레 씁쓸해졌다.

# 돈

시험을 준비하는 지금 모아둔 돈으로 버티고 있지만 통장잔고가 줄어드는 것을 볼때마다 울적해지곤 한다. 영화관이나 술자리에 발길을 끊은 지도 오래다. 책을 사는 일도, 다이소에서 천원짜리 물건을 사는 것조차 망설인다. 시험접수비는 왜이리 비싼지. 필요한 것들도 나중으로 미루고 사고 싶은 것은 눈으로만 만족하고 있다. 사실 모아둔 돈이라고 해봤자 한학기 등록금에도 미치지 못하고 아껴봤자 푼돈이지만 점점 돈의 눈치를 보게된다.

# 청춘

허울만 남은 푸른 봄철, 청춘이란 이름이 더 일상을 괴롭게 만들었다. 취업을 쫓고 있지만 하고 싶은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불안정함을 벗어나 현재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가려 발버둥치지만 그럴수록 점점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이다. 그런 탓에 일상은 권태로움만 늘어간다. 오늘도 어제와 비슷한 하루를 보냈고 내일도 똑같을 것이란 사실에 우울해하는 것도 지쳤다.

이상의 <날개> 주인공이 아스피린인줄 알고 먹었던 수면제가 떠오른다. 사실상 수면제를 아스피린으로 착각하거나 세뇌당해 청춘을, 평생을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인공이 억압된 공간에서 벗어나 집도 거리도 아닌, 미스꼬시 옥상에서 자유와 해방을 위해 했던 말을 외치고 싶어지는 요즘이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리 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내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최혜련

 다채로운 색을 가진 사회가 되길 바라며 씁니다,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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