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재평가가 필요한 의자왕과 백제의 멸망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지금은 부여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옛 백제의 고도 사비, 여러 번 수도를 옮겼던 백제의 역사에서 이 시기는 ‘사비백제’로 불리고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비롯해 궁남지와 부여 나성,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등 다양한 백제의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 그 가운데 백제의 왕릉으로 여겨지는 능산리 고분군에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재위 641~660)과 그의 아들 부여융(615~682)의 가묘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의 정식 명칭은 ‘의자왕단’이다. 백제 멸망 뒤 중국으로 끌려간 의자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허난성 뤄양시(낙양시)에 있는 북망산에 묻히게 된다. 이후 북망산의 흙을 가져와 혼을 옮겨오는 의식을 치르고 조성한 곳이 바로 ‘의자왕단’이다.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 자리한 의자왕단 ©김희태

그간 의자왕에 대해 백제의 마지막 왕이라는 측면과 낙화암으로 상징되는 ‘삼천궁녀’의 이미지로 주색에 빠진 암군으로 인식되었으며, 이는 의자왕과 백제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삼국사기>에 드러난 백제에 대한 인식으로, <삼국사기>의 집필자인 김부식은 백제에 대해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과 대국(唐)에 죄를 지었다는 이유를 들어 백제의 패망을 당연하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의 근본 원인은 결국 <삼국사기>가 편찬될 당시 백제의 입장을 대변할 세력이 없다는 점을 찾아볼 수 있는데,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귀부 이후 고려 내에서 신라계의 입지가 강해진 것 역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백마강에서 바라본 낙화암, 백마강의 유래가 되는 조룡대와 고란사 등을 함께 볼 수 있다. ©김희태

물론 멸망한 나라의 왕이었기 때문에 그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고, 백제 멸망의 일차적인 책임은 의자왕에게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 책임의 방식이 삼천궁녀와 같은 있지도 않은 허위사실로 의자왕을 평가하는 게 맞는지의 여부다. <삼국사기>를 보면 의자왕을 ‘해동증자’로 표현하는데, 이는 의자왕의 효심과 우애가 깊어 불렸던 이름이다. 또한 의자왕 때 백제의 영토 확장 역시 두드러지는데, 미후성을 비롯한 40여성을 비롯해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대야성을 함락시키는 등 기록 속 의자왕의 모습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모습과는 다르다.

고란사의 벽에 그려진 삼천궁녀, 사실이 아닌 삼천궁녀 설화는 의자왕과 백제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김희태

이 때문에 백제의 멸망을 두고 다양한 해석들이 있어 왔는데, 그 중 정치권력의 이동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삼국사기>를 보면 의자왕의 재위 후반부에 들어서면 지나친 토목공사와 이상현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657년 의자왕은 서자 41명에게 좌평으로 삼았다는 기록과 660년 사비하의 물이 핏빛처럼 붉어졌다는 기록 등은 왕권강화와 함께 백제 내부에서 어떤 정변이 일어났음을 추정하게 하는 대목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 ©김희태

또한 최초 기록에 등장한 백제의 태자는 부여융이지만, 백제 멸망기에 ‘부여효’로 바뀌어 있다는 점은 권력을 두고 백제의 내부에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서기>와 <대당평백제국비명> 등에 남겨진 내용을 종합해보면 백제의 멸망과 관련한 시각은 스스로 망했다는 인식과, 주색과 폭정이 있었다는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은고’ 혹은 ‘요부’로 불리는 여인이다. 위의 두 기록 모두 여인이 백제 멸망의 화를 자초했다고 하고 있어, 당시 백제의 내부에 혼란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간접 증거가 된다.

웅진시기의 도읍이자 의자왕이 항복했던 공산성 ©김희태

흔히 백제의 멸망을 660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의자왕의 항복을 백제의 마지막으로 본 견해다. 반면 의자왕이 항복했을 당시 사비(부여)와 웅진(공주) 등 일부만 함락 당했을 뿐, 나머지 지방은 건재했기에 백제부흥운동이 확산될 수 있었다. 따라서 복신과 도침의 활약 속에 왜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왕으로 옹립, 백제의 역사는 지속될 수 있었다. 때문에 663년 백강구 전투를 끝으로 백제부흥군이 소멸한 시기를 백제의 멸망으로 보기도 하는데, 대표적으로 순암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 이 같은 인식을 찾을 수 있다. 이 경우 백제의 마지막 왕은 자연스럽게 의자왕이 아닌 풍왕이 되는 셈이다.

665년 웅진도독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 당나라 유인궤가 취리산에 모여 회맹의 의식을 가졌다. ©김희태

한편 <신당서>를 보면 옛 백제의 지역에 웅진, 마한, 동명, 금연, 덕연 등의 5도독부가 설치되었는데, 이 가운데 웅진도독부의 수장으로 파견된 인물이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이다. 665년 공주에 위치한 취리산에서는 신라 문무왕과 당나라 유인궤와 함께 웅진도독 부여융이 서로 친하게 지내자는 의미의 '취리산 회맹'을 맺게 된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백제의 출현으로 느꼈을 이 날의 회맹을 통해 웅진도독부 시기 역시 백제의 역사로 포괄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나당전쟁을 통해 웅진도독부가 해체된 뒤 한반도에서 더 이상 백제를 유지할 공간이 없자, 당나라는 요동지방의 건안고성으로 백제인들을 이주시켰다. 이른바 ‘소백제’의 출현이다.

나라가 망했음에도 여전히 ‘대방군왕’의 지위를 유지한 부여융 ©김희태

재건된 백제는 당으로부터 대방군왕의 지위를 부여 받았는데, 이처럼 당나라가 백제를 부활시킨 이유는 전형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를 오랑캐로 다스리는 모습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백제의 멸망은 크게 기존의 설인 660년과 백제부흥군의 소멸인 663년설로 구분이 된다. 또한 이도학 교수는 그의 저서 <백제 사비성 시대 연구>를 통해 부여융을 수반으로 하는 웅진도독부 시기(660~672)와 한반도에서 축출된 백제의 재건이 이루어진 소백제 시기를 백제의 역사로 넓게 볼 필요가 있음을 제기한바 있다. 이 견해를 따르자면 백제의 멸망을 발해가 요동지역을 장악했던 8세기 중엽 혹은 9세기 초반까지도 볼 수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능산리 고분군, 언제가 중국에서 의자왕의 묘가 확인이 된다면 그때는 온전히 의자왕의 혼을 모셔올 수 있기를 바래본다. ©김희태

이처럼 능산리 고분군에 조성된 ‘의자왕단’은 그 외형이 초라하고 볼품이 없지만, 이곳에 담긴 역사적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현재까지 북망산에 있다고 알려진 의자왕의 능은 발견이 되지 않았다. 아직 발견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언제 가는 발견이 될 수 있다는 다른 말로, <신당서>에 따르면 의자왕은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 손호(242~280)와 진나라의 마지막 황제 진숙보(553~604)와 나란히 묻힌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위의 둘은 나라를 망친 암군이었으니, 의자왕은 죽어서도 그렇게 모욕을 당했던 것이다. 따라서 의자왕의 능이 확인된다면 온전히 혼백을 모셔와 선대의 왕들이 묻힌 능산리 고분군으로 옮겨오고, 현재 잘못 알려진 삼천궁녀 이야기는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의자왕과 백제 멸망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 문화연구소장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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