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진의 민낯칼럼]

[오피니언타임스=안희진] 해방 후 혼란기에 들끓던 사기꾼들 중에는 “남방 또는 중국전선에 있다가 귀국했다. 일본 군대에서 댁의 아들을 만났다. 같이 고생했다. 친했다”며 학병가족에게 접근해 금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댁 아들은 지금 완전 거지꼴이다. 어찌 어찌하면 빨리 귀국할 수 있다”고 말하며 사랑하는 자식과 형제를 전쟁터에 보내놓고 마음 졸이다가 해방이 되어 이제나 저제나, 애타게 기다리는 혈육을 등친 사기였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다가 ‘소식’을 들고 나타났다니 누군들 속지 않겠는가.

1955년 8월 서울 동작구 흑석동의 학도군 현충비에 모인 학도의용군들. ⓒ학도의용군 6·25참전기념사업회

1921년생인 숙부는 고향인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모 대학 경제학부를 마쳤다. 1943년말 귀국하자마자 징집영장을 받고 1944년 1월 20일, 조선군 평양사단에 입대했다. 입대를 거부하고 지리산에서 파르티쟌 활동을 할 뱃심도,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으로 갈 만한 용기도 없었던 그저 보통학생이었다. 중국 수저우(蘇州)에 주둔했던 말부대(騎兵部隊)에서 병졸노릇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초, 황해도 벽성군(해주시) 동운면 두동리에 학병사기꾼이 나타났다. 이미 학병 사기꾼들에게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을 때였다. 10년 전 남편을 여윈 할머니는 다정다감한 둘째아들 소식을 들고 온 ‘학병출신이라는 사람’을 칙사 대접했다. 할머니는 중국에서 작은아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묻고 캐묻고... 눈물과 환희로 며칠을 보냈다.

숙부보다 7년 연상(1914년생)의 장남인 아버지는 1936년 공부를 마치고 해주군청에 근무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아버지는 그 사람을 학병사기꾼으로 단정하고 할머니에게 ‘살아 있다면 결국 다 오게 돼있다. 저 따위 사기꾼에게 속지 말고 얼른 내쫓으라’며 무섭게 채근했다. 그러나 애가 타는 할머니는 이미 오래 전에 당주(堂主)가 된 ‘무서운’ 큰아들 몰래 큰돈(조기귀국 알선료+수고비+별도의 노자)을 쥐어주며 ‘빨리 오게 해달라’며 동구밖까지 배웅하여 보냈다.

물론 그것도 사기였다. 아버지는 ‘그것보라 내 말이 맞지 않았느냐’고 일갈한 뒤, 냉철하고 당찬 판단력을 내세우며 당주ᆞ가장의 권위로써 할머니를 몰아세웠다. 냉정하고 쌀쌀맞기 이를 데 없는 큰아들에게 크게 상처받은 할머니는 6.25전쟁 발발 후, 1.4후퇴 때 피난지인 수원에서 미공군의 융단폭격으로 무너진 담벼락에 깔려 돌아가실 때까지 큰아들을 힘들어했다. 여동생인 고모들도 마찬가지였고, 시동생을 사랑하고 아꼈던 엄마에게까지도 마음의 큰 상처를 주었다.

1946년 5월, 숙부는 상거지 꼴로 귀국했다. 고향집에 돌아오자마자 득달같이 찾아 온 사람들은 <학병동맹>에 가입하여 인민위원회에서 일을 하자는 학병출신 동지들이었다. 타고 난 성품이나 성향, 성분상 좌익에는 맞지 않는 동생의 번민을 보다못한 아버지는 “혼란기에는 학교에 있는 것이 제일”이라며 서울로 보내 경성대학 경제학과에 편입시켰다. 이것이 할머니에게는 또한번 외로움을 안긴 일이 됐다.

당시 경성대학은 마치 해방정국의 축도라고 볼 수 있는 소위 국대안(國大案) 파동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숙부는 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1기생을 모집한 <서울신문학원>을 마치고 합동통신 기자가 되어 평생동안 기자로서, 한국일보를 마지막으로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1996년 세상을 떠났다. 고향에 남아있던 아버지 역시 좌익 등쌀을 견디다 못해 1946년 7월경 가족들을 이끌고 월남하여 이화대학앞, 서대문구 대현동(당시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대현리)에 정착했고, 농업은행(농협)을 거쳐 정부에 들어가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퇴직했고, 1994년에 세상을 떠났다.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에게 주워들은 얘기들이다. 아버지의 깐깐하고 냉정한 성격을 닮은 나는 괜시리 할머니와 숙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진 때가 있었는데... 아버지 형제는 판이한 성격 차이 속에서도 우애를 지키면서 오랜 세월 동안 ‘전혀’ 다툼없이 참 잘 사셨다. 아마도 다정다감하고 여유있는 성품을 지닌 숙부의 ‘형님 떠받듬’이 지극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아마도 내게, 쓸데없는 오지랖 떨지 말고 형, 누나들을 잘 떠받들고 순종하며 우애 지키고 잘 살라는 교훈이 아닐까 싶다. 

 안희진

 한국DPI 국제위원·상임이사

 UN ESCAP 사회복지전문위원

 장애인복지신문 발행인 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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