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범의 동서남북]

[오피니언타임스=김준범] 정치를 흔히 ‘말의 예술’이라고 한다. 비단 정치만은 아니겠지만 회의하고, 연설하며 설득·논쟁하고 협상하는 모든 것이 다 말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말은 가장 유용한 수단이요 무기인 셈이다. 그러니 정치인들은 말을 잘 해야 한다.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말을 보면 그 수준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말이 곧 정치의 수준을 말해 준다고 보면 된다. 얼마나 사실에 근거한 말로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이고 상식에 맞게 펼치는지를 보면 금방 드러난다. 사실과는 동떨어진 말, 즉 허위사실을 지속적으로 떠들고 다니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요즘 해외에서도 유행하고 있는 ‘가짜뉴스’(fake news)라는 것이 우리 사회에도 심심찮게 발견되고 있다. 그 대부분은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한반도 평화정책에 불만을 가진 일부 집단에 의해 끈질기게 유포되고 있다. 그 중에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음해성 가짜뉴스, 즉 문 대통령이 치매에 걸렸다는 둥 전혀 근거 없는 얘기를 만들어 종횡으로 확산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난 9월 18일 3차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청와대

과거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DJ가 너무 노쇠한 나머지 노망(老妄)이 들었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기저귀를 차고 다닌다는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리곤 했었다. 놀라운 것은 그런 수준 이하의 유언비어가 비단 판단력이 없는 무지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국내 주요 언론사의 중진 언론인들도 이를 안주 삼아 즐겼다는 사실이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음해성 가짜뉴스는 과거 DJ에 대한 그것과 꼭 닮아있다. DJ와 노무현,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 평화를 추구하려는 평화주의자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므로 한반도 냉전체제가 무너지면 자기들의 존립기반도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들 세 대통령이야말로 증오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퍼주기’라는 말처럼 정치적으로 민감하고도 고약한 단어는 찾아보기 드물다. 이 말은 유독 대북 지원사업에 대해서만 사용되는 데, 남북간 교류와 화해협력 등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다. ‘주다’와 ‘퍼주다’는 접두사 하나로 큰 차이를 나타낸다.

‘퍼주다’는 “무책임하게 함부로 마구 주다”라고 국어사전에 나와 있다.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무책임하고, 함부로, 마구 준다는 3가지 부정적인 의미가 이 짧은 3음절의 단어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 말은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 이후 김대중 정부의 대북 지원사업에 대해 당시 야당이 처음 사용하면서 정치무대에 본격 등장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이렇게 부정적인 말을 남북경협 모든 분야에 적용하면서 DJ 정부의 대북지원 사업에 주홍글씨처럼 낙인을 찍어대곤 했었다. 하지만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에서 있었던 각종 대북 지원사업에 대해서는 민정당도 한나라당도, 새누리당도 ‘퍼주기’라고 말하지 않았다. 유독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만 ‘퍼주기’라며 딱지를 붙였다. 그것은 일종의 몽니요 심통 부리기에 다름 아니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말처럼 작금의 한반도는 동북아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다. 4.27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전개된 북·미 정상회담과 북·중 정상회담, 다시 연내 남·북 정상회담이 줄줄이 이어지고 급기야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은 가히 세기적인 격변의 물결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변화의 흐름은 한 마디로 전쟁상태를 끝내고 평화의 길로 나아가자는 의지의 표현이다. 북한의 종전선언 요구와 미국의 비핵화 요구를 서로 맞교환하자는 얘기는 선후만 다를 뿐 종착점은 둘 다 평화를 전제로 하는 셈법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18년이 지난 현 상황에서도 ‘퍼주기’를 버리지 못하고 애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자유한국당의 유기준 의원은 “철도·도로 이렇게 나눠 가지고 그 기간마다 다릅니다만 오늘 일간 신문을 보니까 43조쯤 나와 있고, 나중에는 120조, 150조 이렇게 들어갈 텐데 북한에 대해 퍼주기, 애정공세만 하는 것에 대해서는 국민이 동의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남북간 철도·도로 연결 사업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자유한국당 유기준 의원이 남북 철도연결 사업과 관련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이낙연 국무총리에게 ‘북한 퍼주기’라고 공세를 펴고 있다. ⓒJTBC 뉴스 캡처
유기준 의원은 2014년 8월 당시 남북 철도연결 사업에 대해 ‘실크로드의 첫걸음’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JTBC 뉴스 캡처

박근혜 대통령은 2014년 1월 6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국민의 통일비용 우려가 있지만 통일은 대박”이라며 한반도 통일시대에 대비하자고 말했다. 갑자기 ‘통일 대박론’을 처음으로 들고 나온 것이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그 또한 최순실의 작품이라는 후문이지만, 당시 보수 언론들은 경쟁적으로 통일대박론 띄우기에 열을 올렸다.

당시 유기준 의원은 남북 철도연결 사업에 대해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한반도 종단철도를 연계한 21세기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실크로드 건설의 첫 걸음이 될 것”이라고 예찬했다. 동일한 사업에 대해 그는 이렇게 정반대의 논리를 편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하면 ‘실크로드 건설’이고 문재인 정부가 하면 ‘퍼주기’라는 말인가. 누가 봐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 문제를 다룬 JTBC는 여기에 “북한지역 철도공사에 소요되는 비용은 남한 기준이 아니라 북한기준으로 해야 하고, 그럴 경우 공사비용은 10분의 1 정도로 줄어든다”고 지적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에 가장 재빠르게 반응을 보인 게 바로 조선일보였다.

2014년 1월 1일자 1면에 ‘통일이 미래다’라는 제목의 신년 기획특집은 그해 7월까지 243회에 걸친 장기 연재물로 이어졌다. 시리즈 첫 날의 기사 제목은 “北 관광시설 4조 투입하면 年 40조 번다”고 뽑았다. 남측 예산 4조를 투입한다면서도 ‘퍼주기’라는 말은 어디에도 사용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의 남북경협 관련 각종 사업에 대해 ‘퍼주기’ 논리를 끊임없이 들고 나오는 신문 역시 조선일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때의 논조는 정반대였다. 그래서일까. 요즘 유행어 가운데 “조선일보의 적(敵)은 과거의 조선일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방대한 분량의 조선일보 연재물을 전부 읽었다는 민주당의 박주민 의원은 “남북경협은 그 때나 지금이나 퍼주기가 아니라 퍼오기”라고 되받아쳤다. 입만 열면 ‘퍼주기’라는 창(槍)을 들고 덤벼드는 사람들에게 ‘퍼오기’라는 말은 가장 유용한 방패(防牌)가 아닐까 싶다.

통일이 되면 북한에 전 재산을 투자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는 세계적인 투자가 짐 로저스는 “북한이 시장경제에 들어가면 스타 기업이 줄줄이 탄생할 것이고, 통일한국이 2030년에는 G7에 들어갈 것이며 연평균 4~5% 정도의 고속성장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날 답변에서 이낙연 국무총리도 “한국이 통일되면 세계 2위의 경제 강국이 될 수도 있다는 미국 경제 조사전문 기관의 최근 조사결과도 있다”고 말했다.

똑같은 정책이나 사업을 놓고도 내 편이 하면 로맨스고, 상대편이 하면 불륜으로 낙인찍는 못된 행태는 언제쯤 사라질 것인가. 한국정치가 한걸음 더 성숙되려면 이런 유치한 사람들을 국민의 대표로 뽑아주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할 것이다.

 김준범

 80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전 국방부 국방홍보원 원장

 전 중앙일보 정치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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