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시기별 왕릉에서 나타나는 석수의 변화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일반적으로 왕릉의 정의는 왕이나 왕비, 대비가 묻힌 무덤을 말하는데, 일반적인 묘와 달리 왕릉의 경우 단어 자체가 주는 신비감이 있는 편이다.

예전에 읽은 적이 있는 신영복 선생의 <청구회 추억>을 보면 서오릉으로 소풍을 갔던 일화를 적고 있다. 서울과 그 인근에 사는 사람치고 왕릉으로 소풍 가본 경험은 다들 한 번씩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왕릉은 당대의 철학과 정치, 조각 등의 예술이 총집합이 된 경우로, 당시의 시대를 조명하는 중요한 소재가 된다.

‘목릉’에 세워진 석수(호랑이), 크기만 클 뿐 예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후퇴한 모습이다. ⓒ김희태

가령 선조의 ‘목릉(穆陵)’은 다른 능과 달리 석수와 석인상의 크기만 크고, 예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전에 비해 후퇴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선조의 재위 기간에 임진왜란이라는 참화 속에 당시의 시대적 특징이 반영이 된 경우다. 이처럼 왕릉을 통해 해당 시대를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능에 세워지는 석수와 석인상 등의 석물을 주목해보면 좋다. 한편 우리 역사의 시기별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석물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양이나 호랑이, 말 등의 동물을 새긴 ‘석수’와 ‘문관’과 ‘무관’ 등의 관리를 형상화한 ‘석인상(石人像)’이다.

백제 무령왕릉의 입구에서 발견된 석수, ‘진묘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김희태

이러한 공통된 특징을 가지는 석물이 우리 역사의 시기별로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살펴보면, 왕릉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따라서 오늘부터 2차례에 걸쳐 각 우리 역사의 시기별로 등장하는 석수와 석인상의 변화를 조명해보며, 첫 시간으로 석수의 변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 백제와 신라의 왕릉에서 등장한 석수 : 진묘수와 석사자상

왕릉에서 석수의 존재가 최초로 확인된 사례는 지난 1971년에 공주의 송산리 고분군에 발견된 무령왕릉의 발굴이었다. 당시만 해도 무령왕릉인지 모르고, 입구에 막힌 벽돌을 제거했는데, 이때 사람들의 눈에 괴이하게 생긴 석수와 그 아래에 있는 묘지석이 눈에 들어왔다. 이 묘지석의 해석을 통해 그제야 이 고분이 무령왕릉임이 확인되어 전국적인 화제가 됐다. 이때 무령왕릉의 입구를 지키던 석수가 바로 ‘진묘수(=무령왕릉 석수, 국보 제162호)’로, 무령왕릉의 묘제 양식인 벽돌무덤과 함께 중국의 능묘 제도를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는 흔적이다.

성덕왕릉에 세워진 석사자상, 동시대의 당나라의 능묘 제도를 참고했음을 알 수 있다. ⓒ김희태

신라의 경우 왕릉에 석수가 세워진 사례는 성덕왕릉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때 성덕왕릉에는 4개의 석사자상이 배치된다. 또한 성덕왕릉에는 석수와 함께 ‘관검석인상(冠劍石人像)’ 역시 세워졌는데, 이전의 왕릉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다. 반면 성덕왕릉과 동시대의 당나라의 황릉에서 크기만 다를 뿐 유사성을 드러내고 있어 신라의 왕릉이 당나라 황릉을 참고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조선왕릉의 경우 석수는 호랑이와 양이 조각되는데 비해, 신라는 사자를 새긴 차이를 보인다. 신라는 왜 석사자상을 세웠던 것일까?

흥덕왕릉에 배치된 석사자상, 동, 서, 남, 북으로 4기의 석사자상이 배치되어 있다. ⓒ김희태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신라 사회가 불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았음을 이해해야 한다. 불교에서 사자는 상서로운 동물로 중요하게 인식되는데, 당장 불국사 다보탑에 석사자가 세워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같은 석사자의 배치는 신라왕릉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경주시 안강읍에 위치한 ‘흥덕왕릉’을 통해 봉분을 중심으로 석사자상이 동, 서, 남, 북으로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신라왕릉에서 석사자상이 등장한 사례는 ‘성덕왕릉’을 시작으로 ‘원성왕릉’과 ‘흥덕왕릉’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또한 ‘헌덕왕릉’에도 석사자상을 비롯한 석물이 있었지만, 몇 차례에 걸친 알천(=북천)의 홍수로 인해 유실이 되었다. 이 가운데 분황사 모전석탑에 세워진 석사자상 중 일부가 헌덕왕릉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원성왕릉의 석사자상 ⓒ김희태
분황사 모전석탑, 석사자상 중 일부가 헌덕왕릉의 것이라 전해진다. ⓒ김희태

한편 흥덕왕릉을 끝으로 석사자상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게 된다. 또한 신라의 왕릉 역시 규모가 점차 축소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신라의 쇠퇴와 무관하지 않다. 다만 경기도 연천에 자리한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능은 실전과 재발견을 거쳐 조선 영조 때 개보수 되었다. 따라서 경순왕릉은 외형상 조선의 묘제 양식을 취하고 있으며, 이때 세워진 석수가 지금도 남아있다.

■ 고려왕릉에 등장한 석수 : 조선왕릉으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다.

고려왕릉의 경우 상당수가 개성(=개경)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성에 제약이 있다. 이런 이유로 국내에서 고려왕릉을 볼 수 있는 곳은 강화도와 고양, 삼척 등의 일부 지역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현재 국내에서 확인되는 고려왕릉의 경우 외형상 볼품이 없고, 초라한 모습인데, 각각 대몽항쟁과 고려 멸망의 시기였기에 왕릉이 들려주는 역사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현재까지 국내에 남아있는 고려왕릉 중 석수가 확인된 사례는 ‘강화 가릉’과 ‘강화 곤릉’, ‘고양 공양왕릉’ 등이 있으며, 이 밖에 왕릉급 고분으로 추정되는 ‘능내리 석실분’에서도 석수의 존재가 확인되는 등 신라와는 다른 형태의 석수는 눈여겨볼 만하다.

가릉에 세워진 석수, 좌우 1쌍이 배치되어 있다. ⓒ김희태
가릉의 석수(좌-우), 둘 다 호랑이를 표현하고 있다. ⓒ김희태

앞선 신라왕릉의 경우 석사자상이 봉분을 중심으로 동, 서, 남, 북으로 배치된 형태인 반면 고려왕릉의 경우 봉분의 뒤쪽에 배치되어 있다. 이는 석수의 형태만 다를 뿐 조선왕릉과 다르지 않은 배치다. 대표적으로 고려 원종의 비이자 충렬왕의 어머니인 순경태후 김씨의 ‘가릉(嘉陵)’에서 확인되는 석수는 호랑이를 새긴 석수로, 봉분 뒤쪽에 1쌍이 나열되어 있다. 또한 가릉에서 멀지 않은 ‘능내리 석실분’에서도 호랑이와 양을 새긴 석수를 볼 수 있다. 한편 ‘곤릉(坤陵)’에서도 석양을 새긴 석수의 머리 부분이 확인되기도 했다.

고양 공양왕릉에 세워진 석수, 삽살개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사자와 호랑이로 보는 견해도 있다. ⓒ김희태

이와는 반대로 고려 공양왕릉의 경우 석수가 능의 앞쪽에 배치된 형태다. 석수의 형태와 관련해 ‘고양 공양왕릉(高陽 恭讓王陵)’에 전해지는 삽살개 설화가 있어 이 석수가 삽살개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반면 호랑이 혹은 사자로는 보기도 하는 등 어떤 동물인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이처럼 고려왕릉의 석수는 훗날 조선왕릉의 석수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공민왕의 ‘현릉(玄陵)’은 조선왕릉의 원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왕릉의 품격을 보여준 조선왕릉 : ‘예릉’ 석수가 서로 다른 이유는?

“조선이 개국한 뒤 최초로 조성된 왕릉은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대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최초로 조성된 왕릉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貞陵)’으로, 본래 지금의 서울 정동에 위치했다. 그러다 계모를 미워했던 태종 이방원에 의해 지금의 성북구로 옮겨지게 되고, 그 석물은 광통교를 만드는데 쓰게 했다. 이 때문에 지금도 광통교에 가면 정릉의 석물을 볼 수 있고, 정릉이 있었기에 ‘정동(貞洞)’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이러한 예에서 볼 수 있듯 왕릉은 곧 역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흔적과도 같기에 단순한 무덤으로 보기 어렵다.

철종의 ‘예릉’, 조선 후기의 능에서 앞선 시기의 석물이 혼재된 배경은 무엇일까? ⓒ김희태

이러한 조선왕릉은 신분질서에 따라 왕과 왕비, 대비의 경우 ‘능(陵)’으로 불리게 되고, 세자와 세자빈, 왕을 낳은 후궁의 경우 ‘원(園)’으로 불리게 된다. 이러한 조선왕릉에서의 석수를 보면 능과 원에서 일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외형적으로만 보면 능이나 원은 진입 공간과 제향 공간, 능(원)침 공간 등으로 구분되어 있어 유사한 것 같지만, 각각 배치된 석물에서 차이를 보고 있다. 가령 ‘능’인 경우 석양과 석호를 새긴 석수가 각 2쌍인 반면, 원의 경우 각 1쌍이라는 차이를 보고 있으며, 석인상의 경우 문인석은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반면, 무인석은 능에서만 세워진 특징을 보인다.

예릉의 석수(석양) ⓒ김희태
예릉의 석수(석양), 같은 석양이지만 형태가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김희태

 

여기서 조선왕릉의 석수를 중심으로 보자면, 앞선 고려왕릉의 석수를 계승, 더욱 세밀하게 발전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석수는 시기에 따라 제작 방식이 달랐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 보여주는 곳이 현 서삼릉에 위치한 ‘예릉(睿陵)’이다. ‘예릉’은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능으로, 예릉의 석수를 유심히 보다 보면 서로 다른 시기에 조성된 석양과 석호를 볼 수 있다. 왜 이런 부자연스러운 현상이 나타났을까?

예릉의 석수(석호) ⓒ김희태
예릉의 석수(석호), 본래 중종의 정릉이 있던 곳으로, 땅에 묻은 석물을 재사용한 결과다. ⓒ김희태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릉의 위치에 대해 조명해볼 필요가 있는데, 본래 예릉이 있기 전 이곳은 중종의 장지로 쓰였던 곳이다. 훗날 중종의 능이 천장을 해 지금의 서울시 삼성동으로 천장을 하게 되는데, 바로 ‘정릉(靖陵)’이다. 이때 ‘정릉’의 석물은 옮겨가지 못했는데, 워낙 크기도 하고, 옮길 수단이 마땅치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릉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옛 ‘정릉’에 세워진 석물의 일부를 재사용한 결과 예릉은 조선 후기의 능이지만, 앞선 시기의 석물과 서로 혼재되어 있는 배경이 되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바라볼 지점이다.

능내리 석실분의 석수, 이러한 석수의 변화를 통해 신라와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묘제 양식을 이해할 수 있다. ⓒ김희태

이처럼 석수는 돌에 동물의 형상을 새긴다는 점에서 신라나 고려, 조선의 왕릉에 나타나는 석수는 같은 행위라고 볼 수 있지만, 해당 시기의 종교나 철학, 시대의 분위기에 따라 각기 다른 형상의 동물로 표현된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석수가 등장한 무령왕릉을 시작으로 신라와 고려, 조선왕릉으로  이어지는 변화의 과정을 ‘석수’라는 매개체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 있게 지켜볼만한 내용으로, 해당 왕릉을 답사할 때 보면 좋은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 문화연구소장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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