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미의 집에서 거리에서]

[오피니언타임스=신세미] 몇 달 전 문상 갔던 장례식장서 빈소 안내판을 살펴보다가 내 시선이 한 영정 사진에 멈춰 섰다. 그 사진 속 고인은 1970년대 하이틴영화 ‘고교 얄개’처럼 금박 단추의 검정 교복차림에 교모를 비스듬히 눌러쓴 채 환히 웃고 있었다.

사진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세세하게 알지는 못했다. 고인이 생전에 영정 사진 용으로 중·고교 시절을 추억하며 교복 차림의 사진을 일부러 찍었는지, 아니면 어떤 기회에 촬영한 그 때 그 시절 사진을 영정 용으로 골랐는지… 다만 10대 시절처럼 연출한 초로 신사의 사진을 대하려니 사진 촬영 당시 고인에 감정이 이입되며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날 조문한 지인의 모친도 영정 사진에서 꽃을 배경으로 밝은 표정이었다. 사진 속 고인이 참 편안해 보였기에 사진 이야기를 건넸더니 상주가 말했다. “6개월 전 사진관에서 가족사진 찍을 때 어머니가 원하시는 꽃밭 이미지 배경을 골라 자연스럽게 옆모습을 찍었더니, 문상객들이 다들 영정 사진 이야기를 한다”고.

ⓒ픽사베이

1980년대 현대 수묵화 운동을 주도했고 2000년대 ‘꽃의 화가’ 송수남(1938~2013) 화백이 작고했을 때 장례식장에는 활짝 웃는 영정 사진 앞에 알록달록 원색 꽃들이 가득했다. 고인이 “내 장례식엔 모두가 화사한 복장으로 꽃을 들고, 생전에 좋은 추억을 떠올리며 참석했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했다.

또한 우리나라 1세대 헤어디자이너 그레이스리(1932~2011)의 장례식은 색 고운 장미에 재즈 풍 찬송가가 흐르는 등 분위기가 특별해 일부러 찾아온 사람까지 있었다고 들었다. 고인이 평소 주변에 “나 죽으면 하얀 꽃 꽂고 울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핑크와 빨간 장미꽃으로 빈소를 꾸몄으면. 올 때 제일 멋진 옷 입고 예쁘게 와. 제사는 말고 내 생일에 집에 모여 맛있는 음식 차려 놓고 탱고를 춰 주면 좋겠다”고 했고, 그 뜻을 따라 장례식이며 추모 모임을 진행했던 것.

영정 용으로 당사자가 원하는 분위기와 포즈의 맞춤 사진을 준비하고, 장례에 대한 자신의 바람을 가까운 이들에게 미리 밝혀두는 것도 존엄한 죽음을 준비하는 ‘웰 다잉’의 과정임을 실감하게 된다.

2016년 TV드라마 ‘혼술남녀’에서 학원 강사 역의 등장인물이 세탁소에서 작고한 어머니가 미처 찾지 못한 스웨터를 받아 들고는 어머니 대하듯 보듬는 장면이 있었다. 어머니가 요양 시설 입실 전 홀로 남는 아들이 번거롭지 않도록 살림살이를 깔끔하게 정리 처분했기에, 어머니의 유품 한 점이 아쉽던 아들로선 어머니 옷 한 벌이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드라마 속 어머니가 그러셨듯 나이 들면서 또래 모임에서 사진, 옷가지 등을 정리해 서서히 줄여야겠다는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기란 혈족이라도 여간 심란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물건을 직접 처분해 남은 이들에게 유품 정리의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뜻이다. TV드라마에선 고인을 추억할 유품이 너무 없어 유족의 아쉬움이 컸지만 현실에선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픽사베이

얼마 전 한 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오갔다.

“어머니 돌아가신 뒤 어머니 집을 정리하면서 버린 게 엄청 많았어. 플라스틱 그릇만 큰 박스 가득했어. 그 시대 분들이 다들 그렇게 사셨지만 우리 어머니는 뭐든 버리지 못하고 챙겨두셨거든. 패스트푸드점 1회용품도 아깝다고 씻어 두셨으니까.”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 둘은 일찌감치 약속했어. 둘 중 하나가 먼저 가면 남은 사람이 앞서 간 사람의 유품을 정리하기로. 어느 날 갑자기 죽으면 내 흔적을 자식에게 드러내기가 편치 않을 것 같아. 만만한 여자 형제도 없으니... 아들 딸보다 속사정 잘 아는 친구가 정리해 주면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아.”

실제로 일본에선 사후 유품 정리 및 장례를 대행하는 비즈니스가 등장해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노년층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고 한다. 자신의 사후 뒷일을 전문업체에게 맡기며, 자신의 장례를 직접 계획하고 준비하는 노년들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다.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지인을 불러 함께 자신의 삶을 정리 회고하는 생전 장례식에 대한 기사도 보았다.

유품 정리며 장례에 대한 일은 가족 친지의 몫으로 여겨왔지만 혈연 지연 등 인간관계의 끈이 옅어지기도 하고 지인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싶어하는 세태를 보여주는 비즈니스다. 고령화 사회와 맞물려 일본서는 임종을 준비하는 활동이 ‘엔딩 산업’이라는 명칭으로 성장 추세이며, 장례 공양 전문의 박람회인 ‘엔딩 산업전’도 화제라고 한다.

‘웰 다잉’을 위해 영정 사진 준비부터 죽음에 대처하는 마음가짐, 살림 정리와 상속 증여 등의 재산 관리까지. 다양한 일들의 준비와 진행을 거들고 대행해준다는 이야기다.

다음 주 외할머니와 함께 할머니가 묻히실 공원 묘지를 둘러보러 갈 계획이라는 내 말에 딸이 물었다. “엄마, 그럼 나는 어디에 묻히는 거야?”

연로한 어머니의 ‘자리’만 생각했던 나는 예상치 못한 딸의 물음에 말이 막히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누구나 죽는다는,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는 사실 앞에. 

신세미

전 문화일보 문화부장.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조선일보와 문화일보에서 기자로 35년여 미술 공연 여성 생활 등 문화 분야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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