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곽진학] 한가롭기만 하던 냇물이 몸을 풀고 달음박질하듯 달려가고 소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던 방천(防川)에도 새싹이 드문드문 고개를 내밀었다.

꼬불꼬불한 논과 밭 이랑사이로 푸석한 먼지만 일렁이는 가난한 농촌 마을, 소문난 과일 하나 나지 않고 오직 벼와 보리만을 생명처럼 가꾸고 살았던 초라하고 삭막한 벽촌,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꽃 속의 바람처럼 먼 신작로를 걸어가는 모습은 신비로운 사랑의 북소리 같았다. 난생 처음 아버지 따라 읍내 장터로 향하는 어린 아들의 마음은 마냥 기쁘고 하늘을 날듯이 즐거웠다. 어찌 아들뿐이랴! 훌쩍 자란 아들과 나란히 걷는 아버지의 걸음은 또 얼마나 황홀하고 가슴 뛰었을까? 버스도 다니지 않던 시절, 끝없는 이야기로 20리 길을 단숨에 달려간 아버지와 어린 아들은 천도(千度)의 체온(體溫)을 함께 호흡한 꿈 길 같은 시간이었다.

70년 전, 아버지 따라 장터로 가는 내 찬란한 추억이다.

발길을 멈춘 곳은 소 몇 마리가 외롭게 서 있는 스산한 우시장(牛市場)이었다. 소는 당시 농촌 제일의 재산이었고 가난한 집은 남의 소를 키워 주고 새끼를 낳으면 그 송아지가 자기 몫이 되는 한(恨) 많은 시절이었다. 귀여운 송아지 한 마리가 배가 고팠던지 엄마젖에 머리를 박고 뒷발질도 해 가면서 맛있게 젖을 먹고 있었다. 한 쪽 뿔이 빠진 암소는 주인과의 이별을 아는 듯 나를 슬프게 쳐다보았다. 구석진 모퉁이에는 머리를 곱게 빗은 할머니가 짚으로 싼 달걀 몇 줄을 구름처럼 펼쳐 놓고 찾아 올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장터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소를 사고팔려는 사람들, 장날이면 으레 나다니는 장돌뱅이들, 구경삼아 나온듯한 한가한 농촌어른들로 장터는 부쩍 활기를 띠었다.

ⓒ픽사베이

"장터는 거래와 교환 뿐 아니라 만남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먹거리와 상품은 물론, 온갖 소문과 정보까지도 넘쳐 나는 곳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 다를 바 없다"

점심때가 지났는지 큰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펴 국밥을 끓이는 냄새가 온 우(牛)시장에 진동했다. 아버지는 나를 국밥집으로 데려가 국밥 한 그릇을 시켜주시고 “천천히 다 먹으라. 잠시 다른 할 일이 있다”하시고 황급히 자리를 떠나셨다. 고기 많이 넣어 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으셨다. 손님들은 그냥 선 채로 먹기도 하고 어설픈 의자에 걸터앉아 먹기도 하였는데 밥풀 하나, 국물 한 방울 남기는 사람이 없었다. 쌀 한 톨도 귀하던 시절, 어린 아들에게 따끈한 국밥 하나 사 먹이고 싶어 이 먼 길을 데리고 오셨나 보다.

구정과 추석, 일 년에 한두 번 먹어볼까 말까하는 국밥이었다. 휑하니 자리를 피하신, 안타까운 아버지 마음을 가늠할리 만무한 철없던 나는 그 뜨거운 국밥을 혼자 단번에 다 먹어 치웠다. 장날에 가시면 점심 값이 아까워 늘 끼니조차 거르셨던 아버지 마음을 아파하고 탄식한 때는 매정한 세월이 무수히 흐르고 세상 물정을 어렴풋이 안 후였다. 지금도 국밥을 보면 눈물이 왈칵 쏟아져 앞을 가릴 때가 있다. 회한의 세월 속에 지우지 못할 까만 화석이 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영혼의 갈피 속에 가슴치는 통곡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는 늦게 둔 자식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할까봐 늘 노심초사하셨다. 가장 힘들게 일하시던 농번기에도 생선 한 마리를 마음 놓고 드시지 못하고 때로는 사다주신 어머니께 역정까지 내시던 아버지였다. 언제나 새벽 미명에 콩 껍질과 부드러운 등겨 등으로 쇠죽을 정성들여 끓여 놓으신 후 논과 밭으로 나가시던 너무나 부지런한 어른이셨다.

초등학교도 가보지 못한 아버지는 혼자 글을 익혀 대학을 다녀도 제방(祭榜) 하나 반듯하게 쓸 줄 모르는 아들에게 유 세차 (維 歲次)로 시작되는 축문(祝文)까지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다. 동생들과 셋이서 자취하던 내 고등학교 시절에는 손수 잘게 쪼갠 장작을 메고 먼 길을 오기도 하셨고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고 하셨던 정직하고 올곧은 농부셨다. 봄과 가을 추수 때면 보리와 벼를 베는 일꾼들 뒤에서 이삭을 줍는 나에게 듬성듬성 주어 어려운 사람들이 거두어 갈 수 있도록 배려하시는 속 깊은 아버지셨다. 집 앞 문전옥답을 뚝 잘라 동네 마을회관을 짓는 땅으로 희사하기도 하셨던 넉넉한 아버지였다.

젊은 시절, 비바람과 땡볕을 견디시고 오직 육체 하나로 해맑은 논과 밭을 크게 일구신 자수성가한 어른이시다.

철없는 6남매를 이 땅에 남겨놓고 멀리 떠나신 지 어언 55년, 먼 곳의 그리움이 내 영혼의 마른 기슭에 숨결처럼 녹아든다.

내 생애에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휴식을 누리고 있는 지금, 그리움과 추억, 그 풋풋했던 시절이 이 터무니없는 가슴에 고스란히 숨쉬고 있다.

열병처럼 지나온 내 젊은 날들이 불효와 회한으로 켜켜이 파고드는 것은 어쩐 일인가?

겨울새벽, 어두움을 털고 일어서는 여명의 바람소리가 흩어진 옷자락처럼 출렁이고 있다.

지나가는 소낙비인 줄 알고 잠시 처마 아래 피하면 곧 스쳐갈 줄 알았는데 그칠 줄 모르는 요란한 폭풍우가 되어 고마운 가족들과 형제들, 여러 어른들께 아무 도리도, 책임도 포기한 채 곧 80을 눈앞에 두고 있다.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긴 무심한 세월은 어디론가 안개처럼 사라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오늘은 더 없이 맑고 부드러운 아침햇살이 따사롭기만 하다.

“내 눈빛을 꺼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 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라이너.릴케의 ‘내 눈 빛을 꺼 주소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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