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위치 비정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는 사찰의 존재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고분은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문화재 중 하나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전을 기준으로 피장자가 밝혀진 사례는 극히 드물다. 그나마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는 무령왕릉의 경우 발굴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지석을 통해 피장자가 명확하게 규명된 사례다. 또한 삼국의 항쟁과 나당전쟁으로 이어지는 기간에 중국과의 교류가 이어지면서 이전과 달리 고분에 비석을 세우는 경향을 보인다.

경주 무열왕릉에 세워진 귀부와 이수, 이수에 새겨진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의 명문을 통해 무열왕릉임이 확인되었다. ⓒ김희태

대표적으로 경주 무열왕릉과 문무왕릉, 김인문묘 등에 비석이 세워졌다. 따라서 왕릉 앞에 비석을 세운 경우 명문을 통해 피장자의 규명이 가능한데, 무열왕릉과 흥덕왕릉의 사례가 이에 속한다. 현재 신라왕릉은 경주에 36곳이 있으며, 경기도 연천군에 소재한 경순왕릉을 포함할 경우 총 37곳의 신라왕릉이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신라왕릉의 피장자는 명확하게 규명된 것일까?

■ 실전된 왕릉과 이를 찾기 위한 무리한 위치 비정

천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경주), 하지만 935년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때에 고려로 귀부하면서 역사의 종언을 구하게 된다. 신라가 존속했을 때는 관리가 되었을 왕릉도, 멸망한 이후에는 방치되다가 결국 ‘실전(失傳)’되는 수순을 밟게 된다. 이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 바로 <세종실록지리지>로, 여기에는 당시 혁거세의 능과 각간묘(=김유신묘)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慶州府)’의 기록을 보면 당시 경주에 10기의 왕릉이 있음을 전하고 있다. ⓒ김희태

그러다 중종(재위 1506~1544) 때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의 기록을 보면 왕릉의 위치에 대한 언급이 10기로 늘어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1845년에 간행된 <동경잡기>의 경우 기존의 10기를 제외하고, 괘릉을 포함한 20기의 왕릉이 추가로 언급되고 있어,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신라왕릉의 위치 비정이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신라왕릉연구>를 저술한 고 이근직 교수는 “족보의 성행으로 인해 조상, 특히 시조에 대한 능묘의 무리한 비정으로 나타났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현재 신라왕릉의 경우 피장자가 명확한 것으로 추정되는 일부 왕릉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왕릉이 진위와 관련한 논란이 있는 실정이다.

선도산 고분군 중 진흥왕릉의 전경, 삼국사기에는 “애공사 북봉”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희태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이미 실전되어 오랜 세월이 흐른 상태인데, 어떤 근거로 해당 왕릉들을 비정한 것일까? 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왕들의 장지 기록을 통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위의 두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신라왕릉의 위치 비정에 있어 중요한 이정표가 등장하는데 바로 사찰의 존재다. 가령 박혁거세의 경우 장지가 “담암사 북쪽(=담엄사 북릉, 삼국유사)”라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진흥왕릉과 법흥왕릉의 경우 “애공사 북봉”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해당 사찰의 존재가 확인될 경우 왕릉의 위치 비정에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선덕여왕릉의 위치 비정, 사천왕사지가 결정적이었다.

이처럼 사찰의 존재가 확인되면서 피장자가 규명된 사례가 실제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선덕여왕릉을 들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선덕여왕의 능이 낭산(=낭산 남쪽, 삼국유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릉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결정적인 힌트가 숨어 있다. <삼국유사> 속 “선덕왕이 미리 안 세 가지 일”을 보면, 선덕여왕은 자신이 죽은 뒤 도리천 속에 장사지낼 것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신하들이 도리천의 위치를 모르자, 선덕여왕은 낭산의 남쪽이라고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낭산에 자리한 선덕여왕릉 ⓒ김희태
사천왕사지에서 바라본 낭산,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 선덕여왕릉의 피장자가 규명이 된 경우다. ⓒ김희태

훗날 문무왕이 선덕여왕의 능 아래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면서, 그제야 신하들은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는 불경의 구절을 생각하며 선덕여왕의 지혜에 탄복했다는 기록이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해 보면 낭산에 선덕여왕릉이 있고, 그 인근에 사천왕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현 선덕여왕릉과 사천왕사의 위치가 이와 부합하고, 사천왕사지의 발굴조사를 통해 사천왕사의 명문 기와가 출토되기도 했다. 따라서 선덕여왕릉의 경우 피장자가 명확한 왕릉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원성왕릉, 한때 괘릉으로 불린 곳이다. ⓒ김희태
외동읍 말방리에 위치한 숭복사지, 이곳에서 최치원이 쓴 ‘대숭복사비’의 비편이 확인되었다. ⓒ김희태

한편 앞서 소개한 바 있는 원성왕릉 역시 비슷한 경우로, <동경잡기>에서 보듯 본래 ‘괘릉(掛陵)’으로 불리던 곳이다. 그러다 기록 속에 나타난 사찰의 존재를 통해 피장자가 규명된 경우로, <삼국유사>를 보면 원성왕릉이 “토함산 서쪽에 숭복사가 있고, 여기에 최치원이 쓴 비석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실제 괘릉 인근의 외동읍 말방리에서 ‘숭복사지(崇福寺址)’로 추정되는 사찰의 흔적과 최치원이 쓴 “유당신라국초월산대숭복사비명(有唐新羅國初月山大崇福寺碑銘)”의 비편이 확인되면서, 지금은 괘릉이 아닌 원성왕릉으로 표기되고 있다.

■ 위치 비정의 근거가 되는 사찰을 함께 주목해야 한다.

지난해 청와대에 경내에 있는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977호)’의 이전을 두고, 불상의 원 위치가 어디인지 관심사로 떠오른 적이 있다. 해당 불상의 원래 위치는 ‘이거사지(移車寺址)’로, 경주시 도지동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탑의 부재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영락없는 폐사지의 모습이지만, 해당 사찰은 성덕왕릉을 찾는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남다르다. <삼국사기>를 보면 성덕왕릉이 “이거사 남쪽”에 있다고 했는데, 현 이거사지와 성덕왕릉의 위치와 일치하고 있다.

경주시 도지동에 위치한 이거사지의 전경 ⓒ김희태
이거사지와 남쪽의 소나무 숲에 위치한 성덕왕릉, 삼국사기에는 “이거사 남쪽”에 성덕왕릉이 있다고 했다. ⓒ김희태
성덕왕릉의 전경, 이처럼 “신라왕릉+사찰”의 조합은 신라왕릉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김희태

따라서 성덕왕릉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단순히 왕릉의 외형만 보는 것이 아니라 위치 비정의 근거가 되는 이거사지를 함께 조명할 때 그 의미를 더한다. 흔히 왕릉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면, 일반적인 묘와 달리 신비감과 역사적 무게를 경험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왕릉을 통해 신라의 역사를 조명해본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탐방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신라왕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라왕릉 + 사찰”의 조합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 문화연구소장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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