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오피니언타임스=이동순] 지난 시기 민족사의 험한 세월은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한곳에서 편안히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식민지가 그러했고, 좌우익 이념갈등시기도 그러했습니다.

여러 해 전 쫓기듯 도망치듯 집을 나간 낭군이 어느 날 밤 불현듯 돌아온 정황을 짐짓 떠올려봅니다. 몇 해만에 돌아온 집이지만 이웃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려운 낭군은 주변을 흘끔거리며 불안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워낙 수상한 시절이라 아내는 먼저 대문부터 꼭꼭 닫아걸고 이웃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주변을 빈틈없이 단속합니다. 오후부터 잔뜩 찌푸리던 하늘이 기어이 밤비를 뿌릴 무렵, 아내는 그제야 조용히 방안에 들어와 낭군 앞에 앉아봅니다.

그윽한 눈으로 살펴보고 볼을 쓰다듬으며 서로를 어루만지는 그 기막힌 상봉의 시간을 과연 어떤 필설(筆舌)로 표현할 수 있으리오. 젊은 낭군은 말없이 아내를 으스러지도록 가슴에 지그시 껴안았다가 희미한 불빛에 다시 몇 번이고 각시 얼굴을 들여다보며 손바닥으로 볼을 쓰다듬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가슴 속에 쌓였던 깊은 한이 봄을 맞은 빙하처럼 하염없이 주르르 흘러내립니다. 가시버시는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밤은 점점 깊어가지만 부부는 상봉의 시간이 아까워서 도무지 잠자리에 들 수가 없습니다. 새벽닭이 울기 전, 낭군은 다시 먼 길을 서둘러 떠나야만 했기 때문이지요. 아내는 낭군께 잠시라도 눈을 붙이라고 권해봅니다. 하지만 낭군은 몇 해만에 만난 사랑하는 아내를 옆에 두고 어찌 잠을 잘 수가 있었을까요. 굴곡도 사연도 많았던 우리현대사에서 이 같은 극적인 장면은 얼마나 많이 빚어졌던 것일까요.

바로 이런 기막힌 아픔과 서러움을 애타는 절창으로 담아낸 노래 하나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민요가수 이은파(李銀波, 1917~?)의 '앞 강물 흘러 흘러'입니다. 그 노래는 마치 가슴을 애잔하게 적시는 가을달밤의 창백한 느낌으로 우리 귓전에 아련히 다가옵니다. 가수의 이름 ‘은파’처럼 달빛의 은물결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다시 스르르 쓸려나가는 그런 애처로운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1930년대의 대표 신민요가수 이은파 ⓒ이동순

앞 강물 흘러 흘러 넘치는 물로도
떠나는 당신 길을 막을 수 없거늘
이 내 몸 흘리는 두 줄기 눈물이
어떻게 당신을 막으리오

궂은비 흐득이니 내 눈물방울
밤빛은 적막하다 당신의 슬픔
한 많은 이 밤을 새우지 마오
날 새면 이별을 어이하리

홍상을 거듬거듬 님 앞에 와서
불빛에 당신 얼굴 보고 또 보면서
영화로 오실 날을 비옵는 내 마음
대장부 어떻게 믿으리까

밤새 비가 많이 내려 앞강물이 엄청나게 많은 수량으로 불어나서 길 떠날 낭군의 발걸음을 막을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내는 혼자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그런데 다시 가사의 첫 대목을 찬찬히 음미해보노라면 그 넘치는 앞 강물은 단지 평범한 강물이 아니라 두 사람의 오랜 이별 동안 가슴에 켜켜이 쌓이고 쌓인 사랑과 그리움, 고독과 한탄, 원망과 눈물 따위의 혼합적 구조물로 여겨집니다. 기막힌 상봉의 자리에서 흘리는 눈물의 분량은 앞 강물이나 홍수보다도 한층 더 많은 분량임을 은근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새벽에 떠나고 나면 다시 기약 없는 오랜 이별의 시간으로 이어집니다. 아내는 그것이 애가 타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주저하는 걸음으로 멈칫멈칫 낭군 앞에 다가와서 희미한 호롱불빛에 드러나는 낭군의 얼굴을 흥건한 눈물에 젖은 눈으로 보고 또 보곤 합니다.

이 절절한 페이소스가 담긴 노랫말을 만든 이는 황해도 출신의 작사가 김능인(金陵人, 1911~1937)입니다. 작곡은 진주 출신의 작곡가 문호월(文湖月, 1908~1952)이 맡았지요. 두 분 모두 전국을 다니며 민요발굴과 채록 및 정리에 오랜 경험을 가진 분이었고, 그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민족적 가락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가지며 신민요 장르의 정착과 발전에 헌신했던 시간들은 참으로 고귀합니다. 이 ‘앞 강물 흘러 흘러’는 오케레코드사에서 제작 발표된 가수 이은파의 가장 우뚝한 대표곡일 뿐만 아니라, 1930년대 중반을 대표하는 노래이기도 했습니다.

가수 이은파가 이 노래를 부르게 된 계기는 무엇보다도 작곡가 문호월과의 특별한 인연 때문입니다. 문호월이 관서지방을 돌며 민요수집을 하다가 진남포 지역의 여관에서 잠시 머물던 날, 그곳 권번의 한 기생이 찾아와 가수가 되고 싶다는 고백을 털어놓았습니다. 문호월은 즉석에서 오디션을 보았는데 소리의 여운과 울림이 꽤나 좋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서울로 한번 찾아오라며 주소를 적어주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뒤 그 기생은 과연 문호월을 찾아왔습니다. 그녀가 바로 이은파였다고 합니다. 문호월은 이은파를 위해 여러 곡의 신민요 작품을 작곡해서 열심히 연습을 시키고 음반을 취입하도록 주선했었는데, 이 과정에서 둘은 기어이 사랑에 빠져 동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과정을 유추해보면 원래 기생으로서의 이름이 따로 있었을 터이지만 가요계에 데뷔하게 되면서 ‘은파’라는 예명을 애인 문호월이 지어주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보게 됩니다.

이은파의 대표곡 '앞강물 흘러 흘러' 가사지 ⓒ이동순

이은파의 출생은 정확하게 알려진 자료가 없습니다. 그러나 1939년 잡지 '삼천리' 기사에서 방년 스물둘이라 했고, 오케에 데뷔한 지 4년이라 한 것으로 짐작해보면 1917년생으로 추정이 됩니다. 극작가이자 작사가였던 이서구(李瑞求, 1899~1981) 선생의 글에서 평안남도 진남포(鎭南浦)에서 권번기생으로 활동하다가 빅타레코드사 직원에게 발탁되어 가수의 길을 걷게 되었고, 빅타에서 오케레코드로 소속을 옮긴 것으로 확인됩니다. 평양기생학교에서 수업을 받아서 진남포권번으로 진출한 것을 보면 이은파의 출생지도 필시 관서지방의 어느 한 곳이 아닐까 합니다.

1930년대 초반, 서울에 설립된 여러 레코드회사에서는 무엇보다도 여성가수를 구할 길이 막연했습니다. 그 누구도 가수되기를 꺼려했기 때문이지요. 그만큼 가수를 풍각쟁이라며 천시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여건 속에서 가장 만만하게 찾아가 가수후보를 물색했던 곳이 바로 기생들의 합숙소인 권번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으로 선발된 가수가 왕수복, 선우일선, 이은파, 박부용, 김복희, 김인숙, 한정옥, 미스코리아(모란봉), 김운선, 왕조선, 김연월, 김춘홍, 이화자 등입니다. 신분이 기생이었던지라 당연히 춤과 민요가창에 익숙했을 터였고, 이를 바탕으로 전통적 가락을 십분 활용하는 노래를 창작해서 부르게 했으니 그게 바로 신민요였던 것입니다.

여러 가수들이 신민요를 취입했지만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발군의 실력으로 대중들의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낸 가수가 있었으니 그들은 왕수복, 선우일선, 이은파 등 세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이들 3인을 ‘신민요의 트리오’라 불렀습니다. 듣는 사람마다 가수에 대한 취향이 다를 수 있겠지만 이은파의 노래는 가히 신민요의 여왕이라 부를 수가 있을 정도로 당시 대중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았습니다.

1934년 5월, 빅타레코드사에서 '봄거리', '야속한 꿈길' 등 두곡을 발표하며 데뷔한 이래로 이은파는 약 100여곡 가량의 가요작품을 발표했습니다. 빅타레코드와의 인연은 전체적으로 1년 7개월 정도이며 이 기간 동안 도합 13곡을 발표했습니다. 빅타레코드를 떠나던 무렵 태평레코드, 밀리온레코드 등에서도 몇 장의 음반을 발표했습니다. 밀리온레코드사와 관계를 갖게 된 것은 이은파의 단짝 후원자였던 작곡가 문호월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호월은 밀리온레코드에 자신의 애인 이은파를 적극 소개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가수 이은파의 가장 중심적인 활동터전은 오로지 오케레코드입니다. 이곳에서 이은파는 1935년 7월부터 1939년 8월까지 무려 70여곡이 훨씬 넘는 노래를 집중적으로 발표했습니다. 그 작품 중에서도 문호월의 작곡이 단연 으뜸으로 많았습니다.

1935년 '삼천리' 8월호의 ‘삼천리 기밀실(機密室)’이란 기사에는 이은파의 당시 근황이 등장합니다. 거기엔 ‘약혼 도중’이라는 글귀가 눈에 띠지만 구체적인 경과나 내용은 확인할 길 없습니다. 약혼의 상대가 누구인지, 또 그 결혼이 과연 성사가 되었는지는 전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이은파와 문호월의 염문(艶聞)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대개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잡지사에서 공연히 두 사람의 염문을 떠올려 세인의 관심을 이끌어내려는 저의가 은연중에 느껴지기도 합니다.

1935년 10월1일 대중잡지 '삼천리'가 주최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에서 이은파는 10위권 내에 들지 못하고 나선교(羅仙嬌), 강남향(江南香), 최연연(崔姸姸) 등과 함께 등외로 입선하지만 이 입선은 상당한 수준의 인기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무대에서 열창하는 이은파(위)와 그를 보러온 가요팬들 ⓒ이동순

1935년 10월19일부터 이틀간, 강원도 철원의 철원극장에서는 그곳 정화당축음기 후원으로 오케대연주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공연의 출연진은 이난영, 고복수, 이은파, 김해송, 강남향, 김연월, 한정옥 등입니다. 연극배우 임생원, 신일선, 차홍녀, 나품심, 김진문, 신은봉도 함께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야말로 화려한 출연진들이었네요.

1936년 '삼천리' 1월호에 실린 ‘인기가수 좌담회’가 열렸을 때 이은파는 그 좌담회에 참석하여 오직 한 마디 말만 하고 있습니다. 잡지운영자인 시인 김동환(金東煥, 1901~?)이 가수들에게 취입 전 대체로 어떤 것을 먹는 습관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이은파는 “홍차(紅茶) 한 잔쯤 먹는 것도 좋아요”라고 말하면서 뜻밖에도 홍차 음료에 대한 특별한 기호를 나타냅니다.

같은 책에 실린 '유행가집'에는 '앞 강물 흘러 흘러'의 가사가 수록되었습니다. 1936년 '삼천리' 2월호의 특집기사 ‘신춘에는 어떤 노래가 유행할까’에서 작사가 문호월은 신민요가 대중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실을 소개하며 이은파의 '앞 강물 흘러 흘러'와 박부용의 '노들강변'이 당분간 계속 인기를 유지해갈 것이라고 확신에 찬 전망을 하고 있습니다.

인기가수로서의 이은파는 1936년 8월15일 밤 8시30분 경성방송국(JODK) 라디오프로에 출연해서 고복수와 함께 노래를 부릅니다. 1937년 1월30일부터 이틀 동안 매일신보 주최 ‘재즈와 무용의 밤’에도 출연해서 노래를 부릅니다. 이날 신문에 소개된 이은파 관련 기사는 “민요를 노래할 때 첫손을 꼽게 하는 리은파 양”이라 했고, 그녀의 “곱고 부드러운 합창에는 장내가 사뭇 혼란하기까지 하였다”고 하면서 “재청삼청(再請三請)이 요란하게 물결쳤다”고 매우 특별한 평가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은파의 노래가 조선의 전국을 물결치고 있다”고 하면서 “도화(桃花)빛 두 볼에는 믿음성, 귀염성을 갖추고 있으며 염심(染心)부인의 태가 꼭 백였다”는 표현으로 가수 이은파의 외모를 그립니다. 그러면서 신문기사는 이은파를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조선의 민요가희(民謠歌姬)”라고까지 드높은 평가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은파가 남긴 작품 중 가장 절정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관서천리(關西千里)', '앞 강물 흘러 흘러', '요 핑계 조 핑계', '돈바람 분다', '정한(情恨)의 밤차', '청실홍실', '새날이 밝아오네', '천리춘색(千里春色)', '풍년송(豊年頌)', '덩덕궁타령' 등입니다.

이 가운데에서 ‘관서천리’는 1930년대 중반의 관서 지방, 즉 평안남북도 일대의 유적지와 산촌 풍경이 그림처럼 잘 담겨져 있습니다. 강원도의 해발 677m의 높은 고개인 철령관(鐵嶺關)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방향을 설정해서 관동, 관서, 관남, 관북 등으로 불렀지요. 그 관서지역의 산골에는 떠돌이 행상, 겹겹이 둘러쳐진 험산준령이 보입니다. 슬픈 멸망의 역사를 머금고 있는 낙랑 유적지와 평양 대동강의 서늘한 가을풍경도 등장합니다. 황해와 용당포까지도 애착으로 껴안고 있네요. 그 깊은 관서지역 산골로 지나가는 화물차 소리도 들리고 목화밭에서 힘겹게 구부리고 일하는 산골처녀의 한숨도 들립니다. 모든 것이 황폐화되어가고 참혹한 붕괴 속으로 떨어져가는 식민지의 애잔한 정경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한 폭의 애달픈 그림이라 하겠습니다. 1930년대의 시작품들이 감당하지 못했던 지역정서 담아내고 갈무리하는 일에 오히려 신민요 작품이 그것을 성공시키며 감동적인 여운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모습은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적셔줍니다.

이은파가 가요계에서 홀연히 사라진 뒤에는 황금심(黃琴心, 1922~2001)이 이은파를 대신하여 그녀의 노래를 여러 곡 불렀고, LP음반으로 취입해서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졌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관서천리’를 비롯한 여러 노래가 황금심의 고유노래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원곡가수는 이은파요, 황금심은 이 노래를 세상에 더욱 널리 알린 리바이벌 가수였다는 분명한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관서천리 두메산골 장사차로 떠난 님
이 가을 낙엽 져도 소식이 감감해
산 넘고 구름 넘어 물과 산이 겹치고
떠난 님 옛 양자만 눈앞에 암암

관서천리 낙랑 옛터 대동강은 가을빛
나그네 모란대에 눈물은 집니다
황해는 푸른 바다 뱃길은 끝이 없고
용당포 여울터에 황혼이 짙으오

관서천리 살진 벌판 지나는 차 소리에
목화밭 축등에는 처녀의 한숨
한양이 어데련가 물과 산이 겹치고
떠난 님 옛 양자만 눈앞에 암암

-‘관서천리’ 전문

한편 1935년 5월 태평레코드사에서 발매된 '정한의 밤차'(박영호 작사, 이기영 작곡)는 시극(詩劇) 음반으로도 제작되어 발매되었는데 이 음반에 들어있는 이은파의 삽입곡이 대중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배우 박세명(朴世明)과 신은봉(申銀鳳)이 격정적으로 엮어가는 대사 틈에서 이은파의 이 노래가 울려 퍼질 즈음 청중들은 식민지백성의 슬프고 서러운 심정을 이기지 못하고 기어이 흐느끼도록 만들었습니다.

'노래:여'
기차는 떠나간다 보슬비를 헤치며
정든 땅 뒤에 두고 떠나는 님이여

'대사:여'
님이여 가지마오 가지마오.
당신 없는 세상은 회오리바람 불어가는 어두운 사막이외다.
그리고 피라도 얼어 떨린다는 모질고 사나운 눈보라 속이외다.
차라리 차라리 가시려면 정은 두어 무엇하오.
정두고 몸만 가시다니 이 아니 서러운가요

'노래:남'
간다고 아주 가며 아주 간들 잊으랴
밤마다 꿈길 속에 울면서 살아요

'대사:남'
기차는 가자고 목메어 우는데, 어찌타 님은 옷소매를 잡고 이리도 슬피 우느뇨.
낭자여 잘 있으소, 마음이 천리 오면 지척도 천리요.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도 지척이라오.
달뜨는 밤, 꽃 지는 저녁, 명마구리 소리 처량한 황혼에
만학천봉 굽이굽이 서린 새빨간 안개를 타고 꿈길에서 만나지이다. 오! 낭자.

'대사:여'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당신은 천하의 왼갖 꽃동산을 헤엄쳐 다니는 호랑나비외다.
달디단 말과 슬기 있는 눈빛으로 오늘은 흰 꽃 내일은 붉은 꽃으로
사랑과 맹세를 옮아가는 뜬세상 호랑나비가 아닙니까?
원망스럽소. 밉살머리스럽소, 한번보고 내어버릴 꽃이라면
무슨 억하심정으로 꺾어 놓았단 말이요.

'노래:남'
님이여 술을 들어 아픈 맘을 달래자
공수래공수거가 인생이 아니냐

이은파의 대표곡 '정한의 밤차' 음반 ⓒ이동순

이은파가 음반을 발표할 때 함께 활동했던 작사가로는 이춘풍, 이하윤, 고마부, 두견화(이상 빅타), 김능인, 염일화, 차몽암, 김연수, 남풍월, 박영호, 민정식, 이노홍, 조명암, 을파소(이상 오케), 박영호, 이품향(이상 태평), 최상기, 춘호, 강성복, 최상수(이상 밀리온) 등입니다. 작곡가로는 전수린, 김교성(이상 빅타), 문호월, 손목인, 고하정남, 김송규, 손희선, 박시춘, 김준영, 김영파(이상 오케), 이기영, 남궁월(이상 태평), 이용준, 문호월(이상 밀리온) 등입니다. 가장 가까운 콤비로 활동한 작사가는 박영호와 김능인이며, 작곡가로는 단연 문호월과 손목인입니다.

어떤 기사는 가수 이은파가 1939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쓰고 있지만 이는 분명히 착오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1940년 2월2일 밤 8시40분에 가수 송낙천과 함께 당시 방송프로에 출연하여 '청실홍실', '돈바람 분다' 등을 경성방송관현단 연주에 맞춰 노래한다는 기사가 확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40년 3월13일에는 김용환이 주재하는 반도악극좌(半島樂劇座) 연기부에 참여해서 한 달간 북조선 일대를 두루 순회하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5월 초순에는 서울에서 중앙공연무대를 갖기도 했습니다. 이은파는 1949년까지 몇 차례 무대에 오른 기사가 확인됩니다만 활동은 차츰 뜸해졌고, 1960년 무렵에는 서울 영등포에 은거해서 살고 있다는 소식이 가요계에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이애리수, 강석연 등 가요사 1세대 가수들이 대개 그러했던 것처럼 이은파도 뒷날 배필을 만나 가정을 꾸린 후 자신의 과거신분을 철저히 감추고 오직 자녀양육과 가정생활에만 충실하며 호젓하게 살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이은파가 땀 흘려 닦아놓은 식민지시절 근대 신민요의 전통은 이후 황금심, 황정자, 최정자, 김세레나, 하춘화 등으로 그 맥을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ews34567@opiniontimes.co.kr)도 보장합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