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복의 고구려POWER 17]

[논객칼럼=김부복] “적(敵)은 키가 10자나 되었다. 눈은 길고 깊었다. 털은 붉고 수염이 헝클어져 마치 해초가 어깨에 늘어진 것 같았다. 아마도 거란이 정벌했던 황두실위(黃頭實韋)인 듯하다.…”

조선 병사들과 마주친 러시아 병사의 생김새는 이랬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의 ‘요청’으로 이른바 ‘나선(羅禪) 정벌군’을 파병해야 했다. 나선은 러시아의 한자 표기다.

신류(申瀏) 장군은 조총 사격수 265명을 이끌고 1658년 5월 2일 두만강을 건넜다. 그리고 6월 10일 러시아 군사와 마주쳤다. 그런데 청나라 장군 사이호달(沙爾虎達)이 전리품을 차지하려고 적선을 불태우는 대신 나포하자고 우겼다. 신류는 그 바람에 아까운 병사 7명을 잃어야 했다.

청나라는 ‘만주족 법식’대로 병사들의 시신을 화장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신류는 이를 거부하고 흑룡강가 언덕에 같은 고향끼리 갈라서 묻어주며 눈물을 뿌렸다. 가랑비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이국땅에 와서 모래벌판에 묻힌 몸이 되었으니 참으로 측은한 마음이 이를 데 없구나.”

청나라는 전투가 끝났는데도 조선군에게 계속 주둔, 패잔병을 소탕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군량미마저 조선에서 실어다 먹으라고 횡포를 부렸다. 신류가 항의하자 마지못해 군량미를 주면서 소두(小斗)로 빌려줄 테니 대두(大斗)로 갚으라고 하기도 했다.

러시아 사람들은 현지 주민에게 “머리 큰 사람(大頭人)이 매우 두렵다”며 겁을 냈다고 했다. 조선의 군사들이 벙거지(戰笠)를 쓰고 있는 것을 머리가 큰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렇지만 병사들에게는 ‘개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픽사베이

‘대리전쟁의 과거사’는 신라 때로 거슬러 올라가서 찾을 수 있다.

732년 발해의 장문휴(張文休) 장군이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공격했다. 오늘날의 산동 반도다. 발해군은 천하무적이었다. ‘발해 사람 3명이면 호랑이도 잡는다(三人渤海當一虎)’고 했다. 발해군은 파죽지세로 산동 반도를 휩쓸었다.

당황한 당나라는 부랴부랴 신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혜공왕은 733년 1월 발해의 남쪽을 공격했다. 같은 민족의 뒤통수를 쳤던 것이다.

819년에는 ‘이사도(李師道)의 난’이 일어났다. 당나라는 또 파병을 ‘요청’했다. 헌강왕은 3만 명의 군사를 보내야 했다. 신라 병사들은 헛된 피를 뿌려야 했다.

고려 때는 ‘희한한 대리전쟁’이 있었다. 채하중(蔡河中)이라는 관리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장사성(張士誠)의 난’ 때였다. 채하중은 머리를 굴렸다. 원나라에 잘 보이면 귀국한 후 재상자리 하나쯤 거저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려에 유탁(柳濯)과 염제신(廉悌臣)이라는 정승이 있습니다.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두 사람을 불러다가 장수로 임명하면 난을 쉽게 진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나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파병을 ‘허락’했다. 공민왕이 2000명의 병사를 친히 전송했다. 최영(崔瑩) 장군도 40여 명의 장수 가운데 한 명으로 참전해야 했다.

원나라는 수군(水軍)도 ‘특별히’ 요청했다. 공민왕은 수군 300명도 특별히 골라서 보내야 했다. 1355년이었다.

최영 장군이 버티고 있는 고려군이 패할 리 없었다. 연전연승이었다. 함께 참전했던 ‘달단 군사’들이 고려군의 전공을 시기했다는 자랑스러운(?) 기록까지 남아 있다.

원나라는 당시 ‘요동 지역에 있는 고려군’ 2만 명을 별도로 출병하도록 요청했다. 그래서 고려는 비교적 적은 군사를 보낼 수 있었다. 요동 지역에 고려의 군대가 있었다면 당연히 민간인도 있었을 것이다. 요동에 고려의 영토가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고려는 군사력과 경비를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채하중이 ‘알아서’ 기지 않았더라면 국력 낭비가 덜 했을 것이다. 개인적인 출세를 위해 국익마저 버린 행동이었다.

개죽음에도 ‘등급’이 있다면 가장 허무한 개죽음은 일제 때 강제징집으로 끌려간 학도병, 그중에서도 ‘가미카제 특공대’에서 목숨을 잃은 조선 사람일 것이다.

알다시피, 일제는 2차 대전 때 패색(敗色)이 짙어지자 ‘최후 발악’으로 자살특공대를 조직했다. 전투기를 몰고 돌진해서 자폭하는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뿐 아니라 잠수기(潛水機)에 들어가서 바닷물 속에서 자폭하는 가이텐(回天) 특공대도 있었다. ‘인간 어뢰’였던 셈이다.

그중에서 가미카제 특공대에 투입된 조선 사람이 16명이나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들의 죽음이 자발적인 수는 없었다.

탁경현이라는 조선 출신 특공대원은 1945년 5월 10일 오키나와 출격 하루 전날, ‘조국의 노래’라며 아리랑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노용우라는 특공대원은 출격할 때 ‘조선 엽서’를 간직하고 있었다고 했다. 조선에 있는 가족에게 자신의 기록을 모두 불태워달라는 부탁을 하고 떠났다고 한다.

‘월남전’ 파병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연인원 32만 명의 군대를 파병했다. 처음에는 130명 규모의 의무부대와 10명의 태권도교관을 보냈지만, 나중에는 평균 5만 명 수준을 주둔시켰다. 다른 ‘자유우방’의 군사를 모두 합친 숫자의 10배 규모였다. 전쟁수당은 미군의 20분의 1에 불과했다. 그러면서도 ‘따이한’은 놀랄 만한 전과를 올렸다.

국력이 하늘을 찌르던 때에는 우리가 오히려 파병을 ‘요청’한 적도 있었다.

수나라 문제 양견(楊堅)이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에 ‘오만한 국서’를 보내자 고구려는 발끈했다. 이따위 국서에는 “칼로 대답하는 게 맞는다(以劍可答)”며 ‘요서지역’을 점령해버렸다. 우리 역사에서 흔하지 않은 ‘선제공격’이었다. 그때 동원한 군사가 ‘말갈 기병’ 1만 명이었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말갈 군사들이 고구려를 위해서 싸우는 것을 보고 약이 바짝 올랐다. “말갈 병사가 포로로 잡히면 모조리 파묻어버려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대리전쟁에 참전한 역사뿐 아니라, 대리전쟁을 시킨 역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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