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복의 고구려POWER 21]

[오피니언타임스=김부복] 용과 호랑이가 ‘용호상박(龍虎相搏)’을 한다고 하자.

호랑이는 날랜 앞발질로 용의 머리를 공격할 것이다. 정공법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용이 꼬리를 올려서 역공하기 때문이다. 호랑이가 그 꼬리를 피하려고 하면, 용은 머리를 돌려서 호랑이를 노린다. 그런 동작이 한 순간이다.

호랑이가 용의 몸통을 덮치는 것도 간단치 않다. 용의 머리와 꼬리가 호랑이를 앞뒤에서 협공하는 것이다.

용은 타고난 싸움꾼이다. 몸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용은 무섭다. ‘용린(龍鱗)’ 하나도 물어뜯기 어렵다.

이 무서운 ‘용 용(龍)’자 2개를 바짝 붙여서 ‘용용’이라고 쓰면 무슨 자가 될까. 한자 사전을 뒤져봐야 알 수 있다. ‘나는 용 답’, 또는 ‘두려워할 답’이 ‘정답’이다. 용은 한 마리도 무서운데 두 마리가 공중에서 설쳐대면 아랫것들은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다.

Ⓒ픽사베이

내친 김에 더 찾아보자. ‘용 용’자가 위에 1개, 밑에 2개 있으면 무슨 글자일까. 용 3마리를 ‘삼각형’으로 배치한 글자다. ‘용이 가는 모양 답’이다. 어렵고 까다로운 글자다.

‘용 용’자를 위아래로 2개씩, 모두 4개를 붙여놓은 글자도 있다. ‘말 많을 절’이다. 용 4마리가 한꺼번에 목청을 높이면 시끄럽지 않을 수 없다. 먹이다툼이라도 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어쨌거나, 타고난 싸움꾼인 용은 거칠 게 없다. 무소불위(無所不爲)다. 아랫것들의 아우성이나 비명 따위에는 끄떡도 없다.

대부분의 용이 임기 초에는 ‘소통’을 강조하지만 그 ‘소통’은 곧 ‘불통’, ‘먹통’으로 변하고 만다. 용에게는 귀(耳)를 달아도 ‘귀먹을 롱(聾)’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용이 있었던 ‘과거사’가 적지 않다.

어떤 용은 욕심을 부리다가 ‘돌집’에 감금되기도 했다. 그러면 ‘어수선할 방(龐)’이 되었다. 그런 용은 ‘업룡(業龍)’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업룡은 용의 목만 전문적으로 치는 단두대인 ‘과룡대’에서 처형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용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용은 제법 많았다. ‘용 용’자를 8개나 나열한 문장도 있다. 한자로 ‘龍龍龍龍龍龍龍龍’이다. “용이 용다워야 용을 용이라고 할 수 있지, 용이 용답지 못하면 용을 용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용답지 못한 용’ 중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용이 수(隋)나라 양제(煬帝)다.

양제는 ‘즉위 기념’으로 제2의 수도 건설을 추진했다. 부친인 문제(文帝)가 수도로 삼은 대흥(장안)은 국토의 한가운데에 있지 않아서 ‘천자 체면’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낙양에 신도시인 ‘동도’를 건설하기로 했다.

당시의 낙양은 폐허였다. 양제는 이 폐허에 월 평균 200만 명의 백성을 인부로 동원했다. 수나라의 인구는 890만 호, 4600만 명 정도였다. 인구를 고려하면 무리한 동원이었다. 궁궐에 쓸 목재는 멀리 양자강 남쪽에서도 실어 나르도록 했다. 커다란 통나무 한 개를 운반하기 위해 한꺼번에 2000명이 달려들기도 했다.

그 신도시를 1년 남짓한 사이에 완성시켰다. 성벽 길이가 20여km나 되었다.

양제는 ‘대운하’ 공사도 밀어붙였다. 운하 건설공사 역시 강행군이었다. 땅을 파내고 쌓은 운하 양쪽 둑에는 죽은 인부의 시체가 가득했다. 운하는 백성의 피와 땀으로 건설되었다.

준공식도 거창했다. 용선(龍船)을 타고 운하를 둘러보았다. 수행하는 배의 행렬이 200리나 되었다.

그러다 보니 곳곳이 공사판이었다. 심지어는 여성 인력까지 공사판에 동원하기도 했다. 백성의 생활은 어려워졌다. 강제동원으로 일손을 빼앗긴 들판은 황폐해졌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진동했다.

신도시건설에, 운하에, 이것저것 저지르다보니 경비가 수월치 않았다. 그 돈은 모두 백성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세금 부담이 늘어나고 조세저항이 심각해졌다.

가혹한 세금과 인력동원은 나라를 곪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양제는 고구려 정벌전쟁까지 일으켰다.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수나라는 고작 37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지휘관 한 사람이 공(功)을 세우려면 무려 1만 명의 피가 필요하다고 했다. 본인은 ‘역사에 남는 영웅’으로 기록되겠지만, 그 과정에서 엄청난 부하가 희생될 수 있다는 얘기다.

당나라 시인 조송(曹松)은 ‘황소(黃巢)의 반란’ 때 ‘기해세(己亥歲)’라는 글에서 이렇게 읊었다.

“강산이 전쟁터로 변했는데(澤國江山入戰圖)/ 백성이 어찌 느긋하게 땔나무를 마련하고 산나물을 캐겠는가(生民何計樂樵蘇)/ 그대에게 권하노니 제후에 봉해지는 일을 논하지 말라(憑君莫話封侯事)/ 장수 하나가 공을 이루면 만 사람의 뼈가 마르는 것(一將功成萬骨枯).”

지휘관 하나가 이처럼 많은 피를 흘리도록 만든다면, 나라의 임금이 공을 탐낼 경우에는 그 희생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아득한 옛날에도 이 정도였다. 21세기인 오늘날 야심 많은 지도자가 ‘치적’을 세우기 위해 고집을 부리면 이로 인한 희생자는 최소한 ‘억’으로 헤아려야 할 것이다.

지금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역전쟁’이 그렇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대선 후보’ 당시부터 ‘아메리카 퍼스트’를 강조했다. 그 ‘아메리카 퍼스트’를 이루기 위해서는 중국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황제’로 군림할 참이었다. 공산당 당헌에 ‘시진핑 사상’까지 채택하고 있다. 그런 마당에 트럼프 대통령이 ‘선전포고’를 한다고 굴복할 마음은 좀처럼 없어 보였다. 결국 ‘무역전쟁’이었다.

그 바람에 멍이 드는 것은 두 나라의 국민이다. ‘무역전쟁’으로 관세와 보복관세를 주고받으면서 상품의 수입가격이 올랐기 때문이다. 미국 국민은 값싼 중국 상품의 가격이 뛰면서 부담이 커지고 있다. 중국 국민은 좋아하는 돼지고기마저 먹기 껄끄러워지고 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있다. 두 강대국의 싸움은 세계 경제 전체를 애먹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 ‘두 용’은 성경말씀 한 구절을 좀 뒤져봤으면 싶다. 구약성서 창세기 9장 6절이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도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김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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