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미의 집에서 거리에서]

[논객칼럼=신세미] 5만원권 지폐가 6월23일로 발행 10주년이라고 한다.

5만원권 이전에 널리 통용되는 최고액권은 10만원권 자기앞수표였다. 고액 거래 때면 안전 거래를 위해 10만원권 수표의 뒷면에 이름 연락처 등을 기록하는 신분 확인의 절차를 거쳤다. 일반인의 든든한 비상금이던 10만원권 수표는 이제 5만원권 지폐에 밀려 일상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진 지 오래다.

거의 일회용처럼 유통기간이 길지 않은 수표와 달리, 지폐는 위조 방지 장치 등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 만들며 그 수명이 길다. 지폐는 경북 경산 한국조폐공사 화폐 본부에서 전량 생산된다. 5만원권 지폐의 경우, 면 섬유로 만든 용지에 인쇄 후 납품까지 40일이 걸리고 수명도 10년 이상이라고 한다.

수표는 앞면에 글자와 숫자만 드러나지만, 지폐는 그림 등 시각적 디자인이 더해진 미니 지상 갤러리다. 지폐의 그림들이 유명화가들이 그린 역사 인물의 초상화와 미술관에서 접하는 옛 명화들이기 때문이다.

Ⓒ픽사베이

5만원권 신사임당 초상화는 이종상 서울대 명예교수의 작품이다. 앞면에 조선 중기 예술가 신사임당 초상과 더불어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묵포도도’가 담겨 있다.

뒷면 그림은 조선 중기 화가 어몽룡의 ‘월매도’와 이정의 ‘풍죽도’다. 대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휘날리는 ‘풍죽도’ 앞으로 굵은 줄기가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뻗은 달밤의 매화 그림이 파격적으로 지폐를 가로질러 배치됐다.

1970년대 중반 처음 발행된 5000원권 조선시대 유학자 율곡 이이의 초상도 이 화백이 그렸다. 신사임당 이전에 아들 이이의 초상까지, 이 화백은 화폐에 등장하는 16세기 신사임당-이이 모자의 초상을 30년여 세월의 간극을 두고 되살려냈다. 모자가 화폐 그림의 주인공이며, 두 초상을 동일 화가가 그린 점도 색다른 기록이다. 5000원권의 경우 뒷면의 수박과 맨드라미 그림이 신사임당의 그림으로 전해지는 ‘초충도’다.

이밖에 1만원권 세종대왕 초상의 작가는 김기창 화백이다. 세종대왕 초상 옆의 ‘일월오봉도’ 는 조선시대 국왕의 권위와 존엄의 상징으로 왕의 자리 뒤에 놓였던 병풍의 그림이다. 흰 달과 붉은 해, 다섯 산봉우리가 그려져 있다. 뒷면 그림은 세종 시절 제작한 혼천의,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천문시계 구실을 하던 기구의 이미지다.

한편 1000원권 앞면 조선시대 퇴계 이황의 초상은 이유태 화백이 그렸다. 앞면에 초상의 배경처럼 유학을 가르치던 명륜당 이미지, 뒷면에는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가 담겨 있다. 정선이 계곡 속 서당을 그린 ‘계상정거도’는 ‘퇴우 이선생진적첩’에 수록된 그림이다.

지폐는 아니지만 100원 주화 속 이순신 장군은 장우성 화백의 작품이다.

국내서 본격적으로 우리 화가들이 그린 역사인물의 초상을 담은 화폐가 등장한 것이 1970년대 중반. 한국은행은 화가들에게 화폐용으로 역사 인물의 영정 제작을 의뢰해 1975년 처음으로 1000원권을 내놨고 이어 1977,1979년 5000원과 1만원권을 선보였다.

화폐 초상의 화가들은 각기 전통 영정 기법을 연구한 국내 한국화단의 대가들. 역사 인물에 대한 사료 연구와 고증을 거쳐, 인물의 성정과 심상까지 반영해 초상을 그렸다. 이들 중 현역작가인 올해 81세의 김기창 화백 외에, 김기창(1914~2001), 이유태(1916~1999), 장우성(1912~2005) 화백은 작고했다.

화폐 그림의 원화는 한국은행 소장품이다. 아주 드물게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의 기획전, 국립 박물관 기획전을 통해 일반에 공개되지만 평소 금고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일상에서 별 생각 없이 금액만 눈 여겨 보는 지폐에 화가들의 작품이 담겨 있다니. 이즈음은 카드 위주로 현금 없이도 소비생활이 가능한 시대라지만, 인쇄물이라도 가끔 지갑 혹은 주머니 속 지폐를 접하며 미술관에서나 대면할 수 있는 대가의 작품과 옛 그림을 손 끝으로 느껴볼 일이다.

신세미

전 문화일보 문화부장.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조선일보와 문화일보에서 기자로 35년여 미술 공연 여성 생활 등 문화 분야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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