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 위에서 쓰는 편지]

[논객칼럼=이호준] 산사에 오는 비는 땅이 아니라 가슴으로 떨어집니다. 특히 새벽에 내리는 비는 가슴을 흥건하게 적십니다. 도량석(道場釋 : 새벽 예불 전에 도량을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행하는 의식) 목탁소리가 아니더라도 잠은 저절로 저만치 물러납니다. 투두둑~ 투두둑~ 나뭇잎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 타악기의 리듬을 닮은 낙숫물 소리…. 빗소리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라는 말은 결코 과장된 수식어가 아닙니다.

더 이상 누워있기가 민망해지는 순간입니다. 주섬주섬 우의를 입고 장화를 신고 빗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비에 몸을 씻은 신선한 공기가 우르르 몸을 감쌉니다. 맨 먼저 둘러보는 건 텃밭입니다. 오이와 가지, 토마토를 세심한 눈으로 살펴봅니다. 어제 저녁,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는 소식에 지지대를 좀 더 단단히 박고 한 번 더 묶어주었지만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지게에 거름을 날라 땅심을 돋우고 모종을 낸 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물을 주고 풀을 뽑아주며 정성을 기울여 키운 작물들입니다. 그 과정에서 먹는 재미보다는 키우는 재미가 훨씬 크다는 것을 새삼 배우기도 했습니다.

Ⓒ픽사베이

밭은 다행히 아무 일 없습니다. 지지대에 기대고 덩굴손을 굳게 감아서 비바람을 견딘 모양입니다. 내가 걱정하고 있는 사이에 너희들은 이렇게 온 생을 그러쥐고 있었구나. 한생을 지탱하는 건 혼신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구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모읍니다. 환경 탓을 하는 대신 굳세게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큰 마당을 가로질러 약사대불을 둘러본 뒤 대웅전으로 올라갑니다. 엊그제 나무를 간벌하느라 중장비가 오간 땅이 물러져있어서 걱정하던 참입니다. 다행히 이곳도 무사합니다. 흘러내린 토사를 몇 삽 퍼내면 될 정도입니다. 삽질 몇 번에 몸에 땀이 흐릅니다. 날은 환하게 밝았지만 아직 아침식사 시간은 조금 남았습니다. 창고에 들러 전동드라이버로 어제 하다만 몇 가지 작업을 합니다.

‘처사’라는 낯선 직업을 택해 사찰에 들어오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몸으로 사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요? 처음엔 너무 힘들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대처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석 달이 넘으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게 편해졌습니다. 사찰 내에서만 날마다 10km 넘게 걷습니다. 순전히 일을 하느라 걷는 것이지요. 걸음으로 치면 15,000보에서 20,000보 정도 됩니다. 그 덕에 체중은 10kg 가까이 줄었고 허리띠도 구멍을 다시 뚫기 바쁩니다. 혈압도 뚝 떨어졌습니다. 도시에서 그렇게 노력해도 난공불락이던 몸이었는데 말이지요.

무엇보다 큰 변화는 도구나 기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오늘아침만 해도 자연스럽게 삽과 전동드라이버를 썼습니다. 삽질 정도야 누구나 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생각해보면 도시 남자들 대부분 아주 오래 전에나 삽을 잡아봤을 것입니다. 전동드라이버가 낯선 사람도 많을 테고요. 저도 처음엔 모든 게 어색했습니다. 도시생활을 하면서 도구를 쓸 일이 거의 없었던 탓이지요. 드라이버 정도나 써봤을까요? 그밖에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게 전부였습니다. 손이나 몸으로 살기보다는 머리나 가슴으로 사는 삶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도구의 인간’이라는 본질을 잊고 살아왔던 것이지요.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라고 했던가요? 조잡하긴 했지만 석기라는 도구를 최초로 사용했으며, 똑바로 서서 걸어 다녔다는 원인(原人). 학명은 ‘능력 있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들로부터 시작해서 도구는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발달했는데 저는 그들을 외면하고 살아왔습니다. 별로 쓸 일도 없었지만 필요할 때도 써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저도 ‘도구의 동물’이 돼가고 있습니다. 이 절의 창고에는 각종 도구들이 그득합니다. 저보다 먼저 거쳐 간 처사들이 쓰던 것들이지요. 아직 그들을 전부 사용할 줄은 모릅니다. 이름이나 용도조차 모르는 것도 수두룩합니다. 그게 그것처럼 보이는데 쓰는 곳은 각각 다르다는 것이 신기하기조차 합니다. 손으로 다루는 도구뿐 아닙니다. 각종 장비나 기계도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예초기 정도는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고압분사기를 써서 수각(水閣) 청소를 합니다. 다목적용 4륜 오토바이에 짐을 싣고 다니고 사다리차를 이용하여 고공작업을 합니다. 무엇을 만들거나 고치느라 집중하다 보면 생각도 근심도 훌훌 날아간다는 기쁨도 부수적으로 얻었습니다.

짧은 글로나마 머리 대신 몸으로 사는 행복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습니다. 물론 저처럼 살라거나 반드시 몸으로 하는 일을 찾으라는 뜻은 아니고요. 삶의 방식을 고르는 선택지의 폭을 넓히라는 뜻입니다. 그 옛날 자식을 공부시키는 이유 중 하나였던 ‘사무실에 앉아서 펜대 굴리는 것’만이 잘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저는 부끄러울 정도로 늦게 깨달았습니다.

‘케이블타이’라는 아주 단순한 끈 하나가 얼마나 여러 곳에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는지 알게 된 것만으로도 신세계를 만난 듯 새롭습니다.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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