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승화의 요즘론]

정답과 오답 사이 

얼마 전, 갑자기 아버지가 내게 공무원이 되라고 했다. 정확히는 돈 대줄 테니 공무원 학원 다닐 생각이 없냐는 제안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던 차에 허무해지는 말을 들으니, 웃음이 먼저 새어 나왔다. 나는 내가 왜 공무원이 되어야 하냐고, 나는 시나리오와 영화를 전공했다고 반문했다. 아버지는 그래도 공무원이 되라고 했다. 글 쓰면서 공무원 준비도 하라는 것이다.

말은 쉽다. 하지만 선택과 집중을 해도 능력 부족에 시달리는 내게 ‘갑자기 분위기 공무원’이라니. 다들 목숨 걸고 공무원이 되려는 시대에 그게 말처럼 쉬울 리가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나는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다. 나는 흥분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말을 잘해도 586세대 아버지의 귀는 굳게 닫혀 있었다. 보아하니 아버지의 인식 속에서 나처럼 표류하는 삶은 적합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안정적 직장을 갖는 것과 결혼해서 자리 잡는 모양새일 것이다. 아버지는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었다.

Ⓒ픽사베이

부모님들의 요구란 대개 그런 식이다. 자식이 안정적인 일에 종사하고, 결혼을 하는 등 마음 놓을 수 있는 상태에 놓이는 것 말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아버지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기능이 없다. 불안이 내 인생의 배경색인데 아버지 말대로 바꿔 칠해질 리가 없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진정 정답은 공무원일까? 그러므로 내가 꾸려온 삶은 오답인 것일까?

사는 대로 생각한다 

나는 ‘생각하는 대로 산다’ 보다는,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명제를 믿는다. 방구석에 앉아 세상을 훤히 내다보는 현자도 물론 있겠지만 나처럼 평균 지능을 가진 평범한 인간은 대개 사는 방식대로, 경험한 대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나는 삶을 주제로 무언가를 쓰거나 만들어 온 사람이다. 늘 내게는 무언갈 만들 재료가 필요했다. 그래서 돈 없어도 어딘가로 떠나고, 다소 불안하더라도 행동의 자유가 있는 삶을 지향했다.

아버지 같은 사람이 보기에 그런 내 삶은 무책임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머리로는 그 마음을 이해한다. 쥐뿔 가진 것도 없으면서 무계획으로 사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누군가 내 삶에 대해서 왈가왈부한다고 해서 삶의 방식을 바꿀 정도로 고집이 약하지 않다. 그 사람이 부모님이라 하더라도. 

누군들 안정적인 삶을 싫어할까? 나 역시 매달 월급 받는 직장인들이 부럽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무직자에 가까운 내 상태는 매번 자기소개마저도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안정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공무원’이 되라고 하면 그렇게는 못 산다고 대답할 거다. 내가 중점을 두는 삶의 가치가 ‘안정’에만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가끔은 결핍이야 말로 내게 필수 요소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늘 결핍되어 있다. 물질적으로 특히 그렇다. 만약 내가 안정적이고 일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삶을 산다면 아마 무언가를 쓸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배부르고 등 따신데 뭐하러 머리 아픈 창작을 하겠는가. 그것이 지금 내 삶의 방식이 필연적인 이유 중 하나다.

안정과 인정의 결핍 

급변하는 한국 사회에는 ‘안정’이 결핍되어 있다. 좋은 기업에 들어가도 평생 직장이란 없다. 보통 사람들의 키워드는 ‘불안’과 ‘걱정’이 된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안정’의 대표주자 공무원과 건물주를 최종 지향점으로 삼기에 이른다. 불안은 인정받지 못한다. 

살아오며 ‘변화’만을 반복적으로 겪은 586세대들에게 ‘안정’이 궁극적으로 최고의 가치가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팍팍한 삶이 아버지를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었으리라. 나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한다. 하지만 당신의 기준을 자식에게 들이대는 것은 마음 아프다. 지금 아버지는 자식을 향해 뒤늦은 이기심을 발휘하고 있다. 다 큰 자식을 그만 걱정하기 위해, 자식의 삶이 바뀌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결국 ‘인정(認定)’ 투쟁이다. 내가 삶으로써 나의 정체를 증명해내야 아버지의 반복적인 요구 사항을 그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이해받고 싶지만, 아버지는 끊임없이 자신의 잣대로 나를 평가한다. 

만약 내가 영화의 주인공이라면 이러한 상황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설정된 어떤 순간이다. 이 장애물을 넘어서면 성장한 모습의 주인공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나 뿐 아니라 수많은 청년 세대가 부모 세대와 가치관의 차이 때문에 갈등한다. 과연 누가 이기게 될까. 이는 자식의 성장 서사인가, 아니면 부모의 성장 서사인가. 이 이야기가 인정(人情)있는 결론으로 마무리되길 바란다. 

허승화

영화과 졸업 후 아직은 글과 영화에 접속되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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