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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

기사승인 2019.07.10  09:3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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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하늘의 하프타임 단상 17]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

얼마 전 아내가 내게 한 말이다. 중대한 도전 앞에서 행여 실수하거나 실패할까 봐 긴장하는 젊은이에게 해 줄 법한 조언이다. 이 말을 예순다섯 나이에 듣는다면 조금 문제가 있다.

“응 알았어. 잘할 능력도 안 되고…”
“당신 성격도 그렇고, 다시 옛날처럼 그럴까 봐 그래…”

누구보다도 나의 성향을 잘 아는 사람이기에 노파심에서 한 소리일 것이다. 그러고는 잊어버렸는데, 오늘 아침 그렇게 혼잣말하는 나를 본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

그런데 지금 내가 무얼 그리 잘하려고 하는 거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딱히 그래야 할 일도 없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뭔가를 잘 해보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내 영혼을 고요하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픽사베이

내 안에는 아직도 완벽주의가 고질병처럼 잠복해 있는 것을 느낄 때가 가끔 있다. 불쌍한 캐릭터다. 인간은 결코 완전할 수 없다. 그런 존재가 아니다. 하는 일도 불완전한 게 당연하다. 그게 싫어 발버둥 치니 사달이 난다.

내가 어떤 것보다도 재발을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완벽주의일 것이다. 지난 세월 줄곧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힌 존재다. 그래서 그 부작용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잘 안다. 그것은 주위의 모든 사람을 힘들게 하고, 자신을 큰 고통에 빠뜨린다.

꽤 오래전 일이다. 지금은 모 신문사 사장으로 있는 언론사 후배 B와 이런 얘기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나는 최 선배처럼 안 살 겁니다”
“무슨 말이야?”
“최 선배는 회사에서 100을 하라고 하면 150쯤 해야 직성이 풀리잖아요. 그렇게 안 산다는 거죠”
“그럼 어떻게 살 건데?”
“100을 하라면 70정도만 하려구요”
“나머지 30은 어디에 쓰려고?”
“놀지요. 뭐…”

머리로는 이해가 됐지만,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얘기였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고서야 깨닫는다. 그가 사는 방식이 훨씬 지혜로운 것이었다는 사실을.

가만히 되돌아본다. 나도 내가 쓴 에너지 100중에서 30 정도는 일이 아닌 사람에게 썼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으면 삶의 여정이 좀 더 평안하고 여유로웠을 게 분명하다. 열매도 더욱 풍성했을 터이다.

미국 MIT 공대에서 내놓은 연구결과가 있다.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성공 요인은 ‘능력’이 아닌 ‘관계’였다는 것이다. 자신의 성공 요인으로 ‘전문성과 능력’을 든 사람이 15%인데 비해 ‘좋은 인간관계와 공감 능력’을 꼽은 사람이 85%였다고 한다.

나에게도 ‘좋은 인간관계와 공감 능력’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일 중심의 사람은 빨리 가지만 멀리 가는 데는 한계를 드러낸다. 관계가 깨지면서 오는 부작용 아닌가 싶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 속담을 떠 오르게 한다.

‘능력’이나 ‘잘하려는 마음’이 좋지 않다는 게 아니다. 걸음마를 배울 때부터 잘하는 게 좋다고 교육받으며 살아왔다. 그에 따른 보상도 맛보았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내가 ‘너무 잘하려고’ 애쓰며 살고 있었다. 삶에서 늘 경계해야 할 것이 ‘투머치(too much)’다. ‘너무’가 붙는 순간 삶에 풍랑이 인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느 순간 내 안에서 그 치열함이 사라지고 있음을 본다. 그만큼 내 안에 둥지를 틀고 있는 완벽주의도 사그라들고 있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치열함과 평화가 공존하기는 어려웠다. 이제 치열함이 빠져나간 자리에 조용히 평안이 깃든다.

여러분이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롬12:18)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게 사는데 필요한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겸손과 공감 능력. 육체의 남은 때를 아름답게 살아내기 위해 이제 이를 배우기 원한다.

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않고 내 눈이 높지 않습니다.
내가 너무 큰일들과 나에게 벅찬 일들을 행하지 않습니다.

진실로 내가 내 영혼을 가만히, 잠잠히 있게 하니
젖 뗀 아이가 그 어미와 함께 있는 것 같고
내 영혼도 젖 뗀 아이와 같습니다.

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히 여호와를 바라라. (시 131)

 최하늘

 새로운 시즌에 새 세상을 봅니다. 다툼과 분주함이 뽑힌 자리에 쉼과 평화가 스며듭니다. 소망이 싹터 옵니다. 내가 죽으니 내가 다시 삽니다. 나의 하프타임을 얘기합니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최하늘 news34567@nonga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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