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용의 재계 인사이트]

[논객칼럼=권오용] 1995년 초 일본 게이단렌(経済団体連合会)에 파견되어 있던 필자에게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국제협력담당 임원이 1박 2일로 도쿄에 갈 예정이니 게이단렌 부회장을 만날 수 있게 일정을 잡아달라는 내용이었다. 대개 이런 경우에는 면담 목적을 상대방과 공유해야 하는데, 이번 면담의 목적은 만나서 얘기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라고 했다.

궁금하기는 했지만 주문한 대로 일정은 만들어졌다. 면담에는 도쿄 주재원이기도 한 필자도 배석할 수 없었다. 이례적이었다. 궁금하기는 했지만 중요한 사안이 있나 보다 하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만찬이 끝나고 호텔에 돌아와 둘만 남게 되자 국제담당 임원은 어렴풋이 방문 목적을 풀어놓았다. 당시 최종현 전경련 회장이 도요타 쇼이치로 게이단렌 회장(도요타 자동차 회장)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내용은 한·일 재계가 긴 안목에서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픽사베이

최종현 회장이 경영하던 선경(鮮京, 지금의 SK)그룹은 10년 단위로 사업 계획을 짜서 추진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갓 따낸 이동통신 사업은 10년간을 미국에서 준비해 왔었다. 1980년에 인수한 ‘대한석유공사’도 1971년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신년사에서 비롯됐다. 1993년 전경련 회장에 취임한 최 회장은 전경련 운용에서도 긴 호흡을 강조했다. 그래서 ‘국가 경쟁력 강화’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경제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는 것이 아니므로 최소 10년간의 기간을 갖고 체질을 개선해 나간다면 성장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10년 단위의 사업 추진 방식을 드디어 국제관계에서도 적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필자의 눈에는 보였다. 그가 전경련을 통해 일본 재계에 제시한 사업은 두개였다.

우선 2002년의 월드컵을 한·일 양국이 공동 개최하자고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일본의 월드컵 유치위원장이 도요타 회장이었던 것. 그리고 최 회장과 도요타 회장은 격의 없이 만나 밤새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친했었다. 서로 마음으로 통하는 관계였다. 진정성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왜 이런 제안을 하지?’하는 의문은 생략할 수 있었다. 필요하면 하면 됐다.

그의 두 번째 제안은 30년짜리였다. 한·일간에 해저 터널을 놓자는 것이었다. 서로 으르렁대기만 하던 프랑스와 영국이 도버해협 횡단 터널을 공동으로 추진하면서 머리를 맞대고 협력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일을 같이 하면 친해진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따라서 두 나라 재계가 장기적 안목과 호흡을 갖고 사업을 같이 하면 두 나라 사이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출렁대지 못할 것이라는 게 최회장의 생각이었다.

당시 한·일 관계는 풍랑에 싸여 있었다. 한국은 갓 탄생한 문민정부가 기존의 한·일 관계를 새로운 개념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버블경제가 깨지면서 고도성장기에 누렸던 자신감과 자부심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서 1945년 이후 반세기동안 쌓여온 기존의 패러다임이 변화를 요구받던 시점이었다.

1995년 1월에 고베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 어느 날 아침 게이단렌에 출근했던 필자는 깜짝 놀랄 소식을 들었다. 한국의 전경련이 그 전날 100만 달러를 고베 대지진 구호금으로 보내겠다는 전갈이 왔다는 것. 게이단렌도 놀랐다고 한다. 우선 일본의 기업들은 구호물품은 보내도 현금을 기부하는 일이 흔하지 않은데, 한국에서 현금을 보내겠다는 데 놀라워했다.  다음으로 한국이 일본에 무얼 준다고 하는 것이 처음이었다고 얘기했다.

당시까지만해도 한국은 무슨 일이 있으면 일본에 요구만 했다. 하다못해 규제완화 작업을 해도 일본의 사례를 조사해 달라고 게이단렌에 부탁만 했다. 매년 서울과 도쿄를 번갈아가며 열리는 한·일 재계회의에서도 한국은 요청하고, 일본은 검토해 보자는 것이 주된 의제였다. 현대자동차는 도요타 자동차에 연수생을 받아달라고 했다. 삼성전자는 기술 이전에 힘써달라고 했다. 정부는 무역역조를 완화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한국이 뭘 내놓겠다고 하자 일본의 재계가 놀랐다. 필자가 느끼기에도 둘 사이에 있던 간격이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서로 주고받으며 윈-윈하는 관계로 업그레이드되는 순간이었다. 그런 면에서 당시 전경련의 100만달러는 단순한 돈이 아니라 한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일으킨 획기적인 단초였다.

‘긴 안목에서 같이 일을 해보는 것’, 최 회장이 당시 제안했던 프로젝트는 하나는 성사됐고 하나는 아직 서랍 속에 묵혀 있다. 최 회장의 제안이 있고 1년 후 두 나라는 2002 월드컵을 공동으로 유치했다. 그의 제안대로 월드컵이라는 10년짜리 일을 같이 하면서 두 나라는 친해지기 시작했다. 문화가 교류되고 생각이 공유되더니 마침내 두 나라 지도자가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의 청사진을 선언했다. 1998년 10월 8일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로 수상이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이라는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당시 양국 정상은 한·일 양국 간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발전시키기로했다.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로 눈을 돌리자는 것, 이때 한·일 관계는 지금까지의 어떤 시점보다 좋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재계가 다리를 놓고 정부가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 혜택은 두 나라 국민들이 얻었다.

관점을 미래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머리를 맞대어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20년 전 재계 지도자들은 이걸 했다. 그리고 한·일 관계는 순풍의 돛을 달았다.

지금 정치 지도자들은 이걸 못하고 있다. 위기 때마다 구원투수로 등판했던 재계의 리더십도 실종됐다. 그 사이 한·일 관계는 우방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고 있다.  

권오용

한국CCO클럽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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