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베리아 기행 3]

‘내가 뭐가 될지 난들 알겠는가, 내가 뭔지도 모르는 내가?
내가 생각하는 게 된다고? 하지만 너무나 많은 게 될 생각인걸!
너무나 많은 이들이 똑같은 게 되려 하는데, 그렇게 많이는 있을 수 없다’

포르투갈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1888~1935)의 1928년 시 ‘담배 가게’(김한민 옮김)의 일부다.

리스본에 살면서 70개가 넘는 이명(異名)으로 글을 발표한 시인 페소아에 다가서게 된 것은 지난 10월 중순. 포르투갈 여행을 앞두고, 페소아 시집 3권-‘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민음사),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문학과 지성사)-이 국내서 번역 출간됐다는 뉴스에 눈이 갔다.

포르투갈 대표시인으로 마음에 두었다가, 현지서 수시로 페소아 이미지를 만나면서 그에 대한 호기심이 커졌다. ‘페소아 없는 리스본(혹은 포르투)’ 기행이 힘들 정도였다. 도심 한 카페의 페소아 좌상은 기념 촬영의 명소였다.

페소아묘비가 있던 리스본 제로니무스수도원 기념품가게에 진열된 페소아 책들 ⓒ신세미
제로니무스수도원 페소아묘비 ⓒ신세미

서점서 ‘포르투갈 시인들’ 책 표지를 통해 중절모, 둥근 안경, 뽀족한 턱의 시인과 첫 대면 후, 각종 박물관, 옛도시 신트라의 페나궁 기념품가게며 지하철 간이매장, 문구점에도 페소아가 있었다. 명품 그릇 매장에 진열된 페소아 찻잔 세트, 변두리 주택가 수예품 점의 흰 수건에 수 놓인 페소아 얼굴…

포르투갈 사람들은 그의 글뿐 아니라 이미지까지 자국의 자부심이자 상징으로 일상생활에 끌어들였다. 아이돌 스타의 캐릭터 상품이 아닌 시인 얼굴의 디자인상품이라니, 유명인 마케팅으로 그러려니 하기엔 낯설면서 신선한 감동이었다. 게다가 페소아 캐릭터는 사람들이 애장하는 미모의 배우, 혁명적 분위기의 영웅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포르투갈 소설가 주제 사라마구(1922~2010)도 리스본에 기념관이 있고 사라마구 얼굴의 마그네틱도 눈에 띄었지만 페소아처럼 다양하지 않았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사랑하고 자랑하는 시인 페소아가 궁금해졌다.

컵, 그릇, 수건, 휴대폰커버, 에코백, 티셔츠 등 페소아 캐릭터의 일상용품들. ⓒ신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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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아는 어린 시절 남아공서 영어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생의 대부분을 리스본서 번역 일을 하며 시 산문 희곡 평론을 썼다. 그러나 생전에 주목받은 작가는 아니었다. 1935년 사후 그의 집에서 발견된 원고 더미들이 꾸준히 연구되고 책으로 출간되면서 삶과 문학이 국내외에 알려졌다. 미출간 자료가 2만7500장에 이르며, 국립도서관에서 분류와 연구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그는 유례없이 이명으로 동시에 여러 공간에 존재하는 복수(複數)의 시인이였다. 알베르투 카에이루, 히카르두 헤이스, 알바루 드 캄푸스 등의 이름으로 전혀 다른 인격과 정체성의 시를 발표했다.

‘내 안에 여러 인물들을 만들었다. 나는 끊임없이 인물들을 만들어낸다. 꿈 하나가 시작되면 바로 한 인물이 나타나고, 그 꿈은 내가 아니라 그 인물이 꾸는 꿈이 된다…. 나는 다양한 배우들이 다양한 작품을 공연하는 텅 빈 무대다.’

페소아 및 199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주제 사라마구 캐릭터의 마그네틱들. ⓒ신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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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 페소아기념관의 내외부. ⓒ신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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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아의 자전적 산문집 ‘불안의 책’(문학동네-오진영 옮김)에서 페소아는 ‘나를 찾아 헤매지만 나를 만나지 못한다’거나, ‘나와 나 사이에 있는 이 간격은 대체 무엇인가’고 자문하고 있다.

시를 통해 나이, 성, 고향, 직업, 성격부터 꿈과 상상, 정치적 관점과 종교적 견해가 전혀 다른 인격체의 목소리를 표출한 페소아는 세계 예술가들이 사랑하는 작가다. 그의 문학은 오늘의 문학 미술 음악 영화 등에서 이어지고 있다.

영화로도 유명한 스위스 철학자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페소아의 ‘불안의 책’ 구절로 시작된다. 포르투갈 감독 주앙 보텔료는 ‘불안의 책’을 영화화했다. 이탈리아 작가 안토니오 타부키는 페소아 연구자다. 소설 ‘페르난두 페소아의 마지막 사흘’에서 숨 거두기 직전 페소아와 이명의 대화를 그려냈다.

페소아 초상화 외에 동그란 안경 디자인의 북마커 등 전시품과 상품이 다양한 '페소아의 집' ⓒ신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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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두 페소아’란 제목의 조각도 있다. 철 소재로 작업하는 미국 조각가 리처드 세라의 2007~2008년 작품이다. 페소아 시를 모티브로 한 미국 작곡가 크리스토퍼 베르크의 성악곡은 2006년 평창 대관령음악제 때 세계 초연됐다.

페소아가 포르투갈의 ‘국민시인’이자 세계 시인으로 폭넓은 호응을 얻고 있는 현상이 흥미로웠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느끼고 ‘다른 삶’을 꿈꾸는 현대인들이, 무수한 자아를 문학으로 승화시킨 페소아의 글에서 접점을 발견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작가에 다가서게 되는 것일까. 시인의 삶과 예술을 오늘에 되살리고 있는 자국 및 해외 전문가들의 지속적인 연구와 디자인 상품 개발 등의 기념 사업도 ‘페소아 바람’에 한몫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페소아의 집' 외벽의 검은 간판 속 페소아 옆얼굴이 얼핏 우리 시사만화 '고바우'를 연상케한다. ⓒ신세미

페소아가 죽기 전 15년간 살았던 리스본 도심 건물에서 1993년 문을 연 ‘페소아의 집’은 도서관을 겸한 기념관으로 페소아의 책, 유품, 포르투갈 화가들이 그린 페소아 초상화를 전시하고, 안경테 모양의 서표 등 각종 디자인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한편으로 시 낭송회, 워크샵, 공연, 전시를 통해 시인의 전설을 확대 재생산하는 생동감 있는 문화공간이기도 했다.

페소아 묘비는 사후 50주년이던 1988년 리스본의 관광 명소인 제로니무스 수도원으로 옮겨져, 그 수도원의 건설을 명한 15~16세기 마누엘 1세, 15세기말 인도 항로의 개척자 바스코 다 가마 및 16세기 포르투갈의 문호 루이스 드 카몽이스 등 포르투갈의 대항해 시대 전설적인 역사 인물과 함께 있다. 언덕, 강, 비, 석양 등 리스본의 자연과 역사 문화를 담고 있는 그의 글이 포르투갈의 20세기 전설로 세계인을 일깨우고 있는 것 같다. [오피니언타임스=신세미]

신세미

전 문화일보 문화부장.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조선일보와 문화일보에서 기자로 35년여 미술 공연 여성 생활 등 문화 분야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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